[환자가 된 공대생, 의사가 된 환자]
과학고등학교 재학 시절 생활은 어땠나요?
저는 욕심이 많습니다. 하지만, 공부에 뛰어난 타고난 재능은 부족합니다. 공부를 잘해야 인정받는 우리나라 교육체계 안에서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수학을 좋아했습니다. 좋아하던 수학을 잘하고 싶은 욕심은 많으나 재능은 부족한 탓에 열심히, 많이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수학 특별전형으로 과학고등학교에 시험 없이 입학했지만 입학한 이후에도 제 삶은 여전했습니다. 나름 수학에 자신 있었던 제게 고등학교 수학 올림피아드라는 커다란 벽은 제게 교만의 무서움을 알게 해주었고, 그 덕분에 제게 부족했던 국어,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사회 등의 과목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과고에는 정말 천재들이 많습니다. 수업시간에 졸고 자습시간에도 졸지만, 시험에서는 항상 상위권인 학생도 있습니다. 또, 공부보다 축구를 좋아하고 야간자습은 한번도 참여하지 않지만 1,2등 자리를 놓치지 않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저는 욕심 많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에 남몰래 눈물을 훔쳤던 많은 날들도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약해질 때마다 부모님을 포함한 소중한 친구들의 도움과 격려로 빈틈없이 계획을 짜고 지켜내기 위해 잠을 줄이는 등 아둥바둥 노력한 덕분에 첫 학기 상위 40%의 성적에서 졸업시에는 상위 10%의 성적으로 고등학교 생활을 마무리하고 지망하던 공과대학 화학공학과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수학 특차로 학교에 입학했던 당시 저는 제가 수학자가 될 줄 알았습니다. 감사하게도 중학교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을 지언정, 수학적으로 뛰어난 재능은 없다는 것을 고등부 수학올림피아드에서 확인받고 나서야 내 인생의 전부 같았던 수학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17살의 영혼 깊숙히 스며들어 있던 '수학 좀 하는 애' 라는 타이틀이 주는 만족감과 자부심을 내려놓는 일은 너무도 고통스러웠습니다. 하지만, 혼란 스러운 과정 속에서 중심을 잡고 당시의 나에게 필요한 배움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셨던 부모님과 선생님들의 도움 덕분에 크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허세 가득한 수학 경시대회 책을 버리고 고등국어 책을 달달히 외우며 공부했던 게 기억에 남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아픔을 경험하기 전의 삶은 어떠했나요?
대학시절, 우리은행 부사장 강연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꽤나 성공하신 분이 20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고 하셔서 참석했는데, 강연자님의 작은 키와 빼어나지 못한 외모, 가벼워 보이는 복장의 첫 인상에 실망했습니다. 하지만, 강연이 시작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노련하고 성숙한 기운에 압도되고 말았습니다. 강연 마지막에 그 분이 전하고자 하셨던 한 줄의 메세지는 '경험을 사는 소비를 해라' 였습니다.
그 날 이후, 저의 모든 관심사는 20대 대학생이 할 수 있는 모든 경험을 사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밖으로 드러나능 외모보다 경험을 통해 다져진 내적 성숙의 탁월함을 흘끗 느껴버렸기 때문이겠지요. 그 때 부터 제 인생 모토는 '살인, 강간 빼고 전부 다 해보자' 였습니다. 조금 과격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법적 테두리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경험을 실제로 부딪혀 보고 내면을 성장 시키겠다는 강력한 의지 표명이었습니다 :)
그렇게 폭주기관차는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대학 입학 직후, 소주 3병에도 취하지 않는 음주에 남다른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아빠와의 술자리에서 일찍이 깨달아 버린 저는 제 천부적인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술자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알아가고 친해지며 인맥을 늘려가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술자리에서 흥미를 끌 수 있는 소재와 이야기들을 입술 위에 오르내리며 대학생활을 만끽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욕심 많은 성격 탓에 공부에 소홀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새벽까지 술자리를 가진 후에도 밤을 새서라도 과제를 마치고 아침 수업에 출석했습니다. 친구들과의 약속이 있을 때면 그 시간이 나에게 주는 상이라고 생각하고 그 전까지는 무조건 학과 공부를 했습니다. 덕분에 장학금을 받아 부모님께 선물을 사드렸던 기억도 남습니다.
대학생활에서 동아리 활동은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는 경험입니다. 할꺼면 제대로 하자고 다짐하며 춤동아리에 들어가 난생 처음 스트릿 댄스 '락킹' 도 배워 보고 EXO-K, 비스트 등 가수들의 노래 안무를 연습하여 무대 위에서 공연하는 짜릿함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고학년때는 학내 명예 단체 '알파'를 조직하여서 학생들의 발전적인 문화를 선도하는 것을 목표로, 새로운 가치를 알리는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봉사의 정신을 알리기 위해 '기부에서 연탄까지' 행사로 시내에서 길거리 기부를 받아 연탄을 사서 직접 전달하거나 적정기술의 가치를 알리기 위해 '제 1회 적정기술 공모전'을 개최하여 신문 기사에 장식되기도 하였습니다.
작은 사회를 미리 체험하는 대학교안에서 리더십 경험 또한, 절대 놓쳐서는 안될 경험입니다. 과 대표를 시작으로 과 학생회장으로 1년간 섬기면서 크고 작은 학과 내 행사들을 기획하고 주도하는 경험을 통해 크게 성장했습니다. 학과 사은회, 체육대회, 학과 MT, 학회실 리모델링 사업 등을 진행하면서 크게 2가지를 배웠습니다. 하나는 각각의 입장이 다른 팀원들과 함께 하는 대표자가 가져야할 자세 였고, 둘째는 밖으로 드러나는 자리 일 수록 개인은 한없이 낮아지고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개인의 이익추구만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닌, 타인을 위해 사는 삶도 멋진 삶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소득층 대상 개별 멘토링을 시작으로 근로 봉사활동, 에티오피아 해외봉사활동을 통한 이타적인 삶의 경험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에티오피아에서 경험했던 적정기술의 중요성과, 진단용 바이오 센서 개발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었던 시간들이 현재까지 이르는 삶의 궤적을 만드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반추해보게 됩니다.
공대생만 그득 그득한 대학교 밖의 세상은 어떨까에 대한 궁금증도 있었습니다. 마침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결연을 맺은 것을 보고, 방학 중 학점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2학기 동안 한예종에서 연기 수업을 수강했습니다. 예술 전공의 다른 수강생들과 교류하며 정 반대의 성향의 전공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을 듣고 헤아려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갖기도 했습니다.
시간적으로 여유로운 대학생은 방학 때 가능한 해외로 나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럴 바엔, 학교에서 지원해주는 지원금을 받고 한 학기 동안 해외 교환학생으로 나가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렇게 오스트리아를 거점으로 유럽의 30개국을 약 7개월 동안 짠내투어하며 대학생활 중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제가 다녔던 학교는 연구 중심 대학이었습니다. 교수님들에게 직접 연락하여 연구해보고 싶은 주제를 금전적으로 지원을 받으며 진행해 볼 수 있느 많은 제도들이 있었고, 이를 적극 활용하여 연구자로서의 삶을 경험해보고 싶었습니다. 화학 원리를 이용해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기술을 개발하는 전공의 특성에 맞게 '탄소 양자점을 이용한 광전지 소자의 개발'이라는 주제로 연구를 진행하여 졸업 논문 심사에서 최우수 학부 연구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통해 자신감을 얻고 에티오피아에서 얻었던 인사이트를 바탕으로 바이오 소자 개발 연구를 통해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연구자가 되고자 최종적으로 대학원 진학을 계획했습니다.
당시 저는 부끄럽지만 다소 궂은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저들은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궂은 일은 하는 것은 당연하다' 고 생각했습니다. 그에 반해 '나는 내 인생을 주도적으로 노력하고 가꾸어가고 있으니 나에게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고 합리적인 것이야'라고 굳게 믿어왔습니다. 또한, 그제껏 이뤄 온 많은 성취들과 주변의 기대와 격려는 제 믿음에 확실한 근거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제 인생을 송두리째 뒤 흔든 크나큰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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