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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니애 Apr 18. 2024

엄마가 된 청개구리의 말로

 엄마라는 본캐, 혹은 부캐를 갖고 있는 여성들이 모이면 늘상 자녀 양육과 교육에 대한 고난을 성토하는 대화가 이따금씩, 아니 제법 빈번하게 도마 위에 오른다. 내 가족 험담은 누워서 침 뱉기라는 걸 알지만 얼굴에 침 범벅을 할지언정, 가슴을 시꺼멓게 뒤덮은 먹칠 범벅은 어떻게 지워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아이 문제집을 찢고 말았어요.

 아이들에게 습관적으로 짜증을 내게 되네요. 약을 먹어볼까 했더니 남편이 노력은 해봤냐고 그래요.

 엄마가 뭘 좀 해보려고 하면 집안 꼴이 난리예요, 애들도 난리, 당장 보여줄 수 있는 성과는 없는데 답답하고 답은 없고. 내가 무얼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애들 교육비를 생각하면 한숨이 나와요, 사람 만들기 왜 이렇게 어렵나요.

 저는 바이올린을 던져서 두 동강 낸 적 있어요.

 오늘도 한 판 했어요, 폭언을 하게 되는 나 자신이 미워요.


  우리가 처음부터 맹수는 아니었다. 하이힐을 벗어두고 플랫슈즈를 신었을 때, 손바닥만 한 핸드백을 내려놓고 기저귀 백팩을 둘러메었을 때, 자신도 몰랐던 내 안의 모성을 발견하며 기꺼이 아이를 품에 안았다. 수유브라를 끌르면 어떻게 알았는지 젖내를 맡고서 입을 벌리며 젖줄을 찾아 허덕이는 아기에게 엄마는 1초가 다급했었는데. 모유가 돌아 통통하게 오른 젖을 드디어 물고 나면 아기는 꼴딱꼴딱 넘어가는 따끈함이 만족스러운 듯 엄마를 올려다본다.

 '지금 올려다보는 젖줄이 이 세상의 전부인가 봐!'

그렇게 오롯이 엄마의 얼굴만 담아놓은 그 눈망울에는 사랑한다는 말이 스며있는 듯하여, 볕을 품은 버들 순 같은 뺨을 어루만지며 '엄마도 우리 아가 사랑해'라고 답하는 속삭임.


 밥 한 술 뜨기 힘든 순수 육아만의 시절이 고되다 한들 모성이 이길 것이다 장담하며 새 하루를 시작했었는데, 어쩌다가 우리네는 모성조차 의심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나. 다정한 엄마가 되고 싶었는데 다중이 엄마가 되어가고 있다.


  "아, 진짜 애 키우는 거 이렇게 힘들다고 낳기 전에 왜 말 안 해준 거예요!"


 마침내 터지는 울분이여.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고 싶다. 엄마가 된다는 것의 진실을 가리우고 경고 한 마디 안 해준 그 누군가에게로.

 그러나, 진정 아무도 얘기 안 해주었던 걸까? 기억을 더듬어보자.


 너 같은 딸 낳아봐라.

 아이고, 힘들어 죽겠다.

 나는 괜찮으니 얼른 시집가라.

 목욕탕에 혼자 가 보는 게 소원이다.

 너희 밑에 돈이 한 두 푼 들어가는 게 아니다.

 가시나들 머리카락 줍는 게 일이다, 이게 다 돈이면 얼마나 좋겠어.

 

 알겠는가? 엄마는 분명히 얘기해 줬었다. 양육의 고난을. 눈물방울 땀방울 마르지 않는 나날에 대하여. 그저 엄마의 그 넋두리가 매일 습관적으로 틀어놓는 라디오 소음과 같아서 들려도 듣지 않았을 뿐이다. 엄마는 그냥 그렇게 말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 같아서. 그렇게 아이를 키우는 것도, 집안일을 하는 것도, 잔소리를 하는 것까지 그게 엄마 일이니까.

  

 불효를 행하는 이의 말로다. 그때 엄마의 삶에 미력한 관심이라도 들여 당신의 넋두리를 공감할 줄 알았더라면 지금 이렇게 셋이나 낳아 키우고 있겠냔 말이다. 날 닮은 삼 남매는 역시 엄마는 그렇게 해도 되는 사람으로 여기며 자라고 있는 중이다. 사람 구실 못할 모양은 아니지만 기껏해야 볼 줄 아는 세상의 너비가 베란다 폭만큼, 유튜브 추천 영상만큼인 청춘들인데 부모 됨의 고충을 그들이 알 리가.

부모가 마련한 꽃밭에서 자란 청춘들은 우리의 말을 기억 못 할 것이다. 아이를 낳을 테고, 이렇게 힘들다고 누가 왜 이야기해 주지 않았냐고 되풀이되는 질문을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인생사 문명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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