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필버그가 영화로 써내려간 자서전
여배우들의 립스틱 자국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사무실에 들어온 헐리우드의 전설적인 감독 존 포드는 자신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샘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전한다.
They tell me you want to be a picture maker. Why? This business, it’ll rip you apart. Now, remember this. When the horizon is at the top, it's interesting. When it's on the bottom, it's interesting. When it's in the middle, it's boring as shit! Got it? Good luck to you. Now get the fuck out of my office!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들었는데, 영화판이 얼마나 험한 곳인지 알기나 하고 그러는 거냐? 좋아, 이것만 기억하렴. 관객의 시선을 끌려면 지평선은 반드시 화면 맨 위 혹은 맨 아래쪽에 있어야 돼. 지평선이 한가운데 있으면 그건 따분하기 짝이 없는 거야, 알겠냐? 행운을 빌어주마. 이제 내 방에서 꺼져!
세상에는 두 가지 사람이 있다. 스필버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스필버그의 덕후들에게 영화 <더 파벨만스>는 지평선이 화면 위나 맨 아래쪽에 위치한 영화일 것이고, 후자에 속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지평선이 화면 정 가운데 위치한 영화일 것이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두 시간 반 동안 자신의 어린 시절 얘기를 쉬지 않고 떠드는 걸 듣는 느낌이랄까. 심지어 이 영화에는 두 가지 진입장벽이 있는데 하나는 디지털 카메라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필름으로 영화를 찍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쉽게 공감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유대인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시대적 상황과 감정들이 영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어서 주인공 샘에게 감정이입 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는 점이다. 스필버그 특유의 엔터테인먼트적인 장점들은 모두 사라지고 시종일관 잔잔한 목소리로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읊조리는 스필버그의 이야기에 하품을 참을 수 있는 관객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지만 아무리 졸음이 쏟아져도 주인공 샘이 자신이 찍은 필름을 편집하다가 엄마의 불륜을 알게 되고 벽장 안에서 엄마에게 그 장면들을 영사기로 보여주는 시퀀스에서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집중하기 바란다. 영화를 통틀어 가장 극적인 갈등이 폭발하는 이 장면을 오직 편집의 속도 조절과 카메라 워크만으로 간결하고 뭉클하게 보여주는 솜씨는 역시 스필버그라는 감탄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 컴퓨터 키보드를 두들기거나 마우스를 움직여 편집한 동영상 파일을 스마트폰이나 모니터로 보여주는 요즘 같은 시대에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아날로그적 감수성의 백미를 느끼게 해주는 장면이다.
마무리 역시 스필버그답다. 마지막 장면은 실제로 젊은 시절 스필버그가 존 포드 감독을 만났던 에피소드를 그대로 옮긴 거라는데, 스필버그와 쌍벽을 이루는 명감독 데이빗 린치의 연기도 백미지만 존 포드 감독의 충고를 듣고 밖으로 나오는 샘의 뒷모습을 잡고 있던 카메라가 지평선을 화면 아래쪽으로 배치하기 위해 황급히 틸트 업 하는 장면은 2022년 최고의 라스트씬으로 기억될 것이다. 교수들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는다는 뜻의 ‘과이불개(過而不改)’를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한 건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잘못이 있으면 고치면 된다. 지평선이 한가운데 있으면 카메라를 내리거나 올리면 되는 거다. 그 단순한 가르침이 오늘날의 스필버그를 만들었다,
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