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떻게 하다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문득 이 질문이 나에게로 왔다. 읽고 쓴다는 것은 밥 먹듯 자연스러워서 한 번도 그 시작을 생각해 보지 않았었는데, 이것도 나름의 출발점이 있었던 것 같다.
이 명주. 명주는 고등학교 다닐 때 3년 동안 내리 같은 반으로 만난 친구다. 하지만 키가 커서 뒷 동네에 살았으므로 작았던 나와는 별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는데 고2 때 친해졌다. 명주는 관악기인 바순을 전공했다.
어느 날, 레슨 시간이 촉박해져서 데려다 주기 위해 명주 어머니가 학교에 오셨다. 화사한 하늘색 원피스에 무슨 향수 냄샌지 모를 향기를 풍기며 미소 띤 얼굴로 명주를 차에 태우는 그녀를 본 순간 떠오른 생각은 '저분이 내 엄마였으면 좋겠다 '였다. 빵과 우유를 간식으로 챙겨 오셨는데 마침 옆에 서 있었던 나에게도 그걸 나눠 주셨다. 그날 이후로 명주와 난 조금씩 친해졌다.
명주는 독서광이었다. 그때만 해도 생소했던 여러 작가들의 책을 많이 읽고 내게 소개해 주었다. 우리는 학교 근처에 있던 '성 바오로 서원'에 가서 종교서적들 뿐 아니라 성물도 구경했다. 또 부산의 명물인 보수동 헌책방 골목도 꽤나 누비고 다녔다.
나는 명주가 소개해 주는 책들을 여러 권 샀으나 사실 그리 많이 읽지는 못 했다. 권해준 책들 중엔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같은 것들도 있었는데 이제 조금 독서랍시고 시작한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이해하기엔 그림의 떡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 아이를 따라다니면서 책을 고르고 재밌게 읽은 체 하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책은 친구가 소개해준 또 다른 친구가 되었다.
명주와는 언젠가부터 연락하지 않는다. 삶의 어느 모퉁이마다 선물을 던져주고 사라지는 산타 할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여럿이었다. 명주도 그중의 한 명이었으리라.
아쉽거나 그들을 다시 만나고 싶거나 하진 않지만 가끔 이렇게 그들을 추억하는 건 이 계절에 어울리는 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