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어느 날 오래된 물건들을 정리하다가 문득 몇 권의 공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크기도 두께도 제멋대로 모양 빠지는 허름한 공책들이다.
‘이런 게 있었네’
무심코 공책 여기저기를 펼쳐보다가 나는 그만 정리하는 것도 잊은 채 그 자리에서 한 나절을 보냈다.
참 오래 전의 이야기들이 지금과는 너무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남에겐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는 이야기들이 나에겐 보물처럼 소중하게 마음이 간다. 그러고 보니 나는 참 세상을 많이 산 늙은 할머니가 틀림없다.
문득 이걸 하나씩 들춰내어 우리 자식, 손주, 그리고 지금을 사는 젊은이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공감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이렇게 많이 달라진 세상을 한편씩 내보이고 싶어진다.
외국으로 이사를 다녀오다 보니 안타깝게도 사진들은 거의 없어졌다. 그나마 이런 공책들이 어느 구석에 남아 있었다니
요즈음 내 앞에 이렇게 많은 시간들이 대책 없이 널브러져 있을 줄 몰랐다.
늘 쫓기듯 허둥거리던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한데 지금 나는 시간 속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이다.
어제가 가고 오늘이 또 이렇게 흐르지만 그날이 그날 같고 경계도 없다.
내게 이젠 시간이 남아도는 걸까? 할 일이 없어진 걸까?
할 일이 없다는 건 휴식이 아니다. 이유 없이 그냥 힘들다.
낡은 공책들을 넘기며 나도 고개를 돌려 돌아보려 한다.
분주했던 시간들, 버거웠던 시간들, 뿌듯했던 성취의 시간들, 아프도록 힘들었던 시간들....
돌아보면 참 많은 장면들이 기록영화처럼 내 뇌리에 남아있다.
이제 하나씩 반추해 보려 한다. 누군가와 공감을 해 보고 싶다.
나만 모르는 나.
세수를 하고 거울 앞에 앉는다.
스킨, 로션, 크림을 바르며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매일 아침 하는 일이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이 참 밉다. 아니 곱지 않다.
입가에 짧은 세로줄들은 한 번 눈에 띈 후로 없어지기는커녕 점점 깊이 새겨진다.
할 수 없지 뭐.
갑자기 내가 깔깔 웃는다. 내가 읽었던 어느 날의 일기 때문이다.
신문을 보던 남편이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건너다본다..
“여보, 생각난 게 있어서 그냥 웃은 거예요.”
1971년에 씌어진 페이지다. 내가 시골 초등학교에서 1학년을 맡고 있을 때였다.
~학부모 개인면담이 있어서 방과 후 호영이 어머니를 교실에서 만났다.
면담 전 미리 인적사항을 확인해 보았더니 호영이 어머니가 나와 동갑이었다.
그런데 교실에 그녀가 들어서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농사를 짓느라 그런지 그녀는 무척 늙은 얼굴이었다. 마음이 짠해질 정도다.
여러 가지 면담 끝에 나는 그녀와 친밀감을 보이려고 우리가 같은 나이라고 말해줬다.
그런데 헉! 이럴수가.
그녀가 한 대답은 이랬다.
“아이구. 그렇구나. 그런데 선생님은 애들 가르치느라고 속을 썩여서 이렇게 많이 늙으셨구나!:
“....예? 아, 그런가 봐요.”
이 나이에 어쩜 저리 늙었을까 생각한 그녀가 나를 훨씬 더 늙었다고 측은해 하는 것 같다.
그래도 나는 교양을 차린답시고 대놓고 말은 안 했는데 그녀는 솔직하다.
충격 속에 나는 살짝 깨달았다.
그녀도 나도 모두 자신에 대해선 모르는 채 상대방만 평가한 것 같다.
그게 비록 외모 뿐이랴?
이제 거울 속에 보이는 나는 훨씬 더 늙고 밉다.
그래도 뭐, 어떠랴? 이젠 이렇게 되어버린 나를 바로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