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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통찰

by 예일맨

간만에 놀러 가려고 마음먹고 쉬는 날, 너무 추워서 야외행은 포기했다. 대신 아이와 중고책방에 왔다. 아이는 최근 재미 들린 원피스에, 나는 우연히 발견한 재밌어 보이는 책에 푹 빠졌다.


"진료차트 속에 숨은 경제학"


의료 현장에서 숨은 진실을 파헤치는 의사이자 경제학자들의 책이다. 이제 20% 정도 읽었는데, 인의에 관한 내용이지만 참으로 흥미롭다. 수의에도 적용할 수 있는 여러 분야들이 (정리되지는 않지만) 머릿속에서 팡팡 터진다.




인상적인 부분을 하나 소개하면, 상기도 감염이 있는 환자가 "우연히" 항생제 처방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 의사에게 치료를 받은 경우, 항생제 때문에 좋아졌다 생각해 이후에도 항생제를 처방받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환자가 우연히 만나게 된 의사의 진료 또는 처방 스타일이 추후 환자의 치료 방향을 결정할 수도 있다는 취지로 쓰인 것이지만,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보면 부정확한(불성실한) 진단과 처방이 장기적으로 항생제 남용과 내성 발생 가능성을 증가시켜 환자의 건강에 좋지 못한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것은 비단 인의에만 해당하는 내용이 아니다. 스스로도 부끄럽지만 호흡기 문제(보통 감기 증상이라 일컫는 콧물, 재채기, 코막힘 등)가 있어 내원하는 경우, 보통 명확한 진단이 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정확한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가능성 있는 감별 진단 목록을 정하고 치료와 대증처치 사이의 적당한 목표를 세워 항생제나 소염제 등을 국밥처럼 말아주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물론, 진료비, 시간, 보호자의 니즈 등 여러 문제를 고려한 지극히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방편이라 자위하지만, 사실상 전문가 딱지를 붙인 의료인으로서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래도 변명의 말을 하자면, 확실한 원인을 찾으려면 (그냥 둬도 나을 가능성이 높은 가벼운 질환인데도) 너무 많은 비용이 들고, 또한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게 실력일 테지만…


그럼에도 이 책에서 말하듯, 우연히 만난 (수)의사의 결정이 환자의 현재, 그리고 미래에 가할 영향까지 생각한다면, 질환의 진단과 치료에 정말 신중한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없다.


동네 동물병원에서 우연히 만난 나라는 수의사 때문에 아이가 덜 고생하고, 덜 아프게 되었다면, 그리고 보호자의 시간과 비용도 아낄 수 있게 되었다면… 이 얼마나 서로에게 기분 좋은 우연이란 말인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우연한 일상에서, 수없이 진열된 책더미 속에서, 이토록 값진 통찰을 주는 책을 우연히 만난 것은 정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우연히 살기 좋은 나라에서 태어나 우연히 좋은 부모, 아내, 아들, 그리고 많은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도 역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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