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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브런 Nov 25. 2024

낙엽처럼 날아온 부고, 나도 뭘 남길지를 고민한다

애통한 부고를 접하고 '맨붕' 중에..고인들은 내 마음속에 살아있다

▲시안추모공원



요즘 부고는 낙엽처럼 쓸쓸해 보인다. 과거엔 생각보다 담담했는데, 이제는 고인과 맺은 인연들을 반추하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진다. 그만큼 나이를 먹은 증거일 테다.



부고를 받으면 의당 빈소를 찾아 유족들과 슬픔을 나누는 게 맞다. 만약 고인과 가까운 사이라면 더 그렇다. 하지만 가끔 병중이라는 핑계로 못 갈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돌덩이를 가슴 어딘가에 달아 놓은 것처럼 마음이 무겁다.



이번엔 가족의 만류를 무릅쓰고 최근 두 고인의 빈소를 찾았다. 고인들과의 동행은 내게 평생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 아니라 병중에는 생각만으로도 위안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 분은 내게는 아버지 같은 분이다. 실제 고인은 아버지와 이북 동향으로 서로 친구같이 지냈다. 두 분은 얼마 전까지도 카톡으로 전화로 안부를 주고받았다.



고인의 부고를 받고 아버지와 나는 온종일 '멘붕'에 빠졌다. 손에 일이 잡히지도 않았다. 아버지 또한 충격으로 인해 그날은 경로당 가는 걸 포기하고 가만히 인생의 허무함을 달래셨다.



발인을 앞둔 전날, 나는 밤늦게 고인의 빈소를 찾았다. 조문하면서 보니 영정 사진 속의 고인도 날 위로하는 것 같았다. 유족 중 아들은 "아버지가 생전에 당신(나)이 투병 중인 것을 안타까워하시면서 자주 걱정하셨다"라고 전했다.



실제로 고인은 사위가 근무하는 병원을 통해 내 병의 전후 과정, 예후를 알아볼 정도로 자식같이 대했다. 사실 당신 몸도 건사하기 힘든 연세일 텐데도 귀찮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분은 게다가 사재를 털어 실향민을 돕고 후손들을 위한 장학금도 쾌척하셨다. 이 일은 내가 고인의 애향사업을 곁에서 잠시 보좌하면서 알게 됐다.



고인의 선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경우 6.25 전쟁으로 전국에 흩어진 실향민을 모아 군민회를 조직해 서로 돕고 달래주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실향민의 아픔 먼저 알고 나누던 선배... 유언으로 남긴 말



나는 깨달았다. 분단의 아픔과 이북고향의 뿌리를 잊지 않고 노력하는 일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고인을 만나지 않았다면 내 정체성은 고사하고 실향민들의 애환과 통일에 대한 개념조차 모르고 지냈을 것이다.



한때 국내 제지업계를 이끌기도 한 고인은 미래를 내다보는 통찰력으로 평생을 사셨다. 그래서인지 빈소에는 고인의 후덕한 인품을 흠모하고 따랐던 사회와 고향후배들로 가득했다.



또 한분은 내 고등학교 6년 선배이다. 사실 사적으로는 7촌 아저씨뻘이다. 하지만 학교 선후배로 더 자주 만났다. 특히 고교 동문 등산모임에서 매달 함께 보낸 세월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고인은 대학 때 산악회를 조직한 경험을 살려 20여 년 전부터 고등학교 등산회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동문들의 친목과 건강을 위한 모임으로 등산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혜안으로 모교 등산회는 7백여 명에 이르는 규모로 발전했고, 지금도 매달 50여 명의 동문들이 산에 오르고 있다. 지난달에는 203회 등산을 기록했다.



이 고교 선배는 수십 년 산을 타고 '백두대간'을 여러 번 종주했다. 그런 실력 덕에 선배에게 모교 등산회의 등산은 사실상 마실 가는 수준에 가까웠다. 그러나 선배는 생전 아프기 전까지 동문 산행에 한 번도 빠지는 법이 없었다.



그는 산에서 먹을 동기들의 간식을 늘 바리바리 챙겨가곤 했다. 후배들의 먹거리도 준비해 나눠주고 자신은 꼭 나중에 먹었다. 그게 그분 나름의 베풂이자 행복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렇다고 티 내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분 주위에는 늘 사람이 모였다. 선배 따라 베푸는 동문들이 늘었다. 덕분에 등산회 친목은 갈수록 다져지고 모두가 그를 존경했다.



그가 2년 전 갑자기 병석에 누웠을 때 산에 오르지 못하는 걸 가장 아쉬워했다. 그의 유언 중 하나도 등산회가 발전하는 데 도움을 준 선후배들에 대한 고마움이었다고 한다.



그는 '영원한 산악대장'으로 불렸다. '산사나이'들답게 고인의 빈소에는 수많은 동문들이 자리했다. 산에서 맺은 우정과 인연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인을 장지까지 모시는 운구도 후배들이 자청했다. 시안추모공원에서 안장을 주관하는 사람이 말했다.



"이렇게 장지까지 수십 명이 따라오는 경우는 드문데 고인이 생전에 베푸신 게 많았나 봅니다. 짐작컨대 너그러운 분 같습니다. "


이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훔쳤다. 이승에 남은 후배들은 그럼에도 선배의 어진 마음과 사랑으로 결코 쓸쓸한 것 같지 않았다.



이렇게 본받고 싶은 고인들을 연이어 보내면서 허전한 마음을 누를 길이 없다. 고인들은 어쩌면 내게, 이제 나 스스로 길을 나설 때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 혼자서는 한동안 갈 길을 헤맬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두 분의 온기를 그리며 용기를 낼 것이다.



사람은 언젠가 세상을 떠난다. 거부할 수 없는 이치다. 고인들이 생전에 내게 준 가르침을 기억해보면서, 그들처럼 내 남은 인생에 무엇을 남길지 고민해 본다.



오늘 글로 쓰는 이 주제는 다소 무거웠다. 하지만 존경하는 고인들의 빈소를 찾아 마지막까지 함께 한 뒤 보내드리니 마음만은 후련하고 가볍다. 삼가 고인들의 영원한 안식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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