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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서 May 21. 2024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의 몫을 찾아

파리누쉬 사니이 『나의 몫』

긴소매의 회색 상의와 이마에서부터 흐르듯 얼굴과 목을 감싸 맨 크림색 스카프. 대조적인 빛깔 때문인지 더 깊고 진해 보였던 갈색 눈망울. 큰아이와 베스트프렌드인 알리 엄마의 첫인상은 그렇게 낯선 듯 신비로웠다. 다섯 살에 이란에서 미국으로 이주해 왔다는 알리는 큰아이가 미국 학교생활에 빨리 적응할 수 있게 도와준 고마운 친구이다. 성격도, 취향도 비슷한 데다 2년 내내 같은 반에 배정되면서 두 아이는 누구보다 두터운 우정을 쌓아가고 있다. 이 정도 단짝이라면 나 역시 알리 엄마와 가깝게 지낼 법도 한데, 나는 그녀와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학년 설명회 때 한 번, 히잡을 두른 그녀와 잠깐 인사를 나눈 게 전부다.


알리를 알기 전, 고백하건대 나는 이란을 비롯한 중동 국가들에 대해 무지한 편이었다. ‘테러, 무슬림, 전쟁 국가’라는 이미지에 갇혀 중동을 그저 위험 지역으로만 여겨왔다. 나와 상관없는, 낯설고 아득하기만 한 곳. 위치조차도 머릿속 지도로는 그 방향을 또렷이 짚을 수 없어 인터넷으로 찾아봐야 했던 나라들. 하지만 큰아이와 베스트프렌드가 된 알리를 알고부터 나는 ‘이란’, 이 두 글자가 들어간 뉴스 기사를 건너뛸 수 없게 되었다. 『나의 몫』이란 책을 읽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차도르를 두른 여인의 옆모습이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파리누쉬 사니이의 장편소설 『나의 몫』은 이란 혁명(1979년) 전후를 배경으로, 한 여성의 삶을 그려낸 이야기이다. 이란 정부에 의해 두 번이나 판매 금지 조치를 당했다는 소개글 만으로도, 주인공의 삶이 얼마나 파란만장할지 짐작하기 충분하다.


반듯한 글씨체로 시를 적으며 문학도를 꿈꾸는 아이, 마수메. 하지만 학교에서 좋은 점수를 얻어도 가족들은 여자아이에겐 중학교 3년으로 충분하다며 다음 학년 진학을 반대한다. 아버지를 설득한 교장선생님 덕에 다행히 마수메는 학교에 남게 되지만 아버지를 제외한 가족들은 그런 마수메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 계집애들은 쓸모없다고 말하는 할머니와 괜한 열등감에 수시로 마수메를 두들겨 패는 오빠들, 그런 오빠들을 모른 체하는 어머니까지. 마수메는 그 모든 학대를 감내하며 묵묵히 학교를 다니지만 우연히 약국에서 만난 사이드와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서부터 비극이 시작된다.

         

사이드로부터 받은 편지가 가족들에게 발각되던 날, 마수메는 연애편지 한 장 때문에 비도덕적인 여자애라고 손가락질을 받는다. 어머니와 오빠들은 마수메와 사이드의 연정이 깊어지기 전에 “시장에 내놓은 상품”처럼 마수메를 급하게 시집보내려 하고, 그렇게 마수메는 열여섯의 나이에 강제 결혼을 하게 된다. 마수메의 남편 하미드는 당시 샤 독재체제에 맞서는 반(反) 독재정권 세력의 조직원. 그는 마수메의 오빠들과 달리, 여자들을 탄압해서는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마수메의 감정선을 따라 읽으며 ’제발 그녀의 남편이 좋은 사람이길‘ 간절히 바라던 나는 이런 하미드의 깨인 말에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하미드는 마수메의 독립적인 삶을 응원하는 만큼 자신을 옭아매지 않길 바랐고, 대의를 위해 바깥으로만 나돌며 가정을 소홀히 한다.


이후 하미드가 혁명 운동을 하다 붙잡혀 감옥에 수감된 후, 마수메는 두 아들의 엄마, 수감자의 아내, 직장인, 학생으로서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이게도 희생과 고난의 가시밭길을 걷게 되지만 나는 마수메가 그다지 절망적으로만 보이진 않았다. 적어도 그녀는 할머니나 어머니처럼 스스로를 나약하고 쓸모없는 존재로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수메는 악착같이 두 아이들을 챙기고 홀로 경제 활동을 하면서도, 시간이 되는 대로 대학 수업을 듣고 책을 읽으며 학업을 이어간다. 그녀는 이제, 자신이 스스로가 믿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엄마는 네가 네 생각과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책을 읽고 배워서 모든 것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결정을 내렸으면 좋겠어. 얄팍한 이데올로기는 너를 함정에 빠뜨릴 거야.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다가는 편견을 갖게 되고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펼치지 못하고 삐뚤어지게 되어 있어. 결국에는 편협한 광신자가 되어버리지.

-파리누쉬 사니이, 2017, 『나의 몫』 [eBook], 북레시피, 9장-

마수메가 아들에게 하는 말들을 곱씹어 살피다 보면, 그녀가 주위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오롯이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마수메의 노력에도 사회는 그녀를 ‘있는 그대로’ 보려 하지 않는다. 격변하는 정치 상황에 따라 시시 때때로 변화하는 시선들. 마수메는 혁명 운동가의 아내로 감탄과 찬사를 받다가, 하미드가 처형당한 후에는 공산주의자의 아내라는 이유로 직장과 대학에서 버림받는다. 이후, 이란-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아들이 돌아오면서 다시 참전용사의 어머니로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일거리를 제안받는다. 모든 평판은 마수메의 능력에 따른 결과가 아닌, 그저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판단일 뿐. 마수메는 그 속에서, 아무 권리 없이 소멸되어 가는 ‘자신’을 깨닫고 공허함을 느낀다.     


차갑게 굳은 마수메의 마음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첫사랑 사이드를 다시 만나게 되면서부터다. 하지만 자식들은 재혼이 전통에 위배되는 것이라며 마수메와 사이드의 만남을 반대한다. 어머니의 추문이 자신들을 당혹스럽게 만들 것이라면서 명예와 이름을 더럽히지 말라는 아이들. 자식들에게 심한 모욕을 당한 마수메는 삶의 의지를 상실한 채 이렇게 말한다.

      

우리 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이 있어. ‘각자의 운명은 태어나는 날 이마에 새겨지는 것이다. 각자의 몫은 따로 정해져 있어서 하늘과 땅이 뒤집힌대도 바뀌지 않는다.’ 가끔 나는 이런 생각을 했지. 이생에서 나에게 마련해 놓은 운명은 무엇일까? 나에게도 나만의 운명이라는 게 있을까? 아니면 난 내 인생의 남자들, 나를 자신들의 신념과 목적의 제물로 삼은 남자들의 삶을 지배하는 운명의 일부인 걸까? (중략) 마치 나라는 존재는 있지도 않은 것 같아. 나에게는 아무 권리도 없어. 내가 나를 위해 살아본 적이 있나? 나를 위해 일을 한 적이 있었나? 선택을 하거나 결정을 할 권리가 있은 적이 있었나? 누군가가 나에게 뭘 원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었냐고.

-위의 책, 10장-

          

끝내 마수메는 사이드의 손을 잡지 않는다. 소설 초반에 오빠들이 그녀의 목을 조르고, 마수메 홀로 아픈 아들을 들쳐 매 병원으로 향하던 극적인 장면들보다, 나는 이 장면이 더 참담했다. 존엄을 지키고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부단히도 달려왔던 여정을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부정하는 것만 같아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아무리 꼿꼿하게 일어서려 해도 자꾸만 주저앉게 만드는 암담한 현실. 작가는 섣부른 희망을 노래하기보다 비참한 심정을 담담히 전하는 쪽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마지막 페이지에 담긴 “피곤했다. 짊어진 외로움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라는 문장 이후의 이야기를 홀로 상상해 본다. 다음 페이지가 이어진다면 마수메는 자유와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

      

책이 출간되고 십여 년이 흘렀다. 최근에도 이란에서는 히잡을 부적절하게 착용했다는 이유로 한 여성이 ‘도덕 경찰’에 끌려가 폭행당하다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히잡 시위 등 권위에 맞서는 움직임이 늘어나고는 있지만 여전히 여성들의 인권이 정치 이데올로기를 위해 이용당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용기 내야 하고 관심 가져야 함을, 이 소설을 통해 다시금 깨닫는다.


심리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이 책의 저자 파리누쉬 사니이는 한국 출판사와의 인터뷰에서 “사회가 우리에게 지워준 의무를 생각하기 이전에, 우리 모두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 완전한 인간이 되고 싶다면 스스로를 존중하고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규칙으로 짜인 사회의 틀 속에서 시민으로서의 의무에 짓눌리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다.”라고 당부한다. 부당함을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견뎌내지 않고 내면에 귀 기울이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 나는 이것이 이슬람 여성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68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임에도 지루하지 않게 사흘을 꼬박 집중해서 읽었다. 전자책으로 읽느라 남은 분량을 가늠하기 어려웠던 점도 있지만 마수메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그녀의 시간 속에 함께 머물렀다. 책을 덮고, 다시 마수메의 다음 페이지를 상상해 본다. 부디 무거운 외로움을 벗어던지고 홀로 가볍게 당당히 설 수 있기를. 그 용기가 그녀의 딸 쉬린과 다음 세대에까지 울림을 줄 수 있기를 바라며, 그녀들의 여정에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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