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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자일보 Jan 10. 2024

왜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야 하는가?

나는 한 달 전에 신장결석으로 3번의 수술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무사히 3번의 수술을 마쳤다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3번째 수술 후 다음날 아침에 일이 벌어졌다. 열이 39도까지 오른 것이다. 심상치 않은 컨디션이라고 생각이 되어 GP클리닉에서 2시간을 기다리다 너무 아파서 사립병원의 응급실에 갔다. 피검사 등 몇 가지 검사를 하더니 나는 바로 ICU에 입원하게 되었다. 나는 심한 패혈증에 걸린 상태였다. 정상 혈압이 120/80인데 내 혈압은 60/40까지 떨어졌고 심장마비가 새벽에 2번이나 왔다. 심장마비가 왔을 때 내 혈압은 수축기가 320까지 솟구쳤고 눈앞에는 주마등이 펼쳐졌다. 말로만 듣던 주마등이 내게도 찾아온 것이다. 눈앞에 티브이 화면 같은 것이 펼쳐지고 계속 지나갔다.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영상은 뚜렷하게 기억이 난다. 나는 두 번의 심장마비를 겪으면서 나도 모르게 회개를 하고 잠들었다. 그리고 아침에 깨어보니 심장통증이 감쪽 같이 없어진 상태였다. 심장전문의도 자세한 검사를 해보더니 이상하다는 듯이 심장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마치 내게 두 번째 삶을 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정민 목사님의 [왜 예수인가?]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크리스천은 오늘밤 죽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한 생각을 분명히 해야 삶도 분명해집니다…. 죽음을 바르게 의식할 때 비로소 이생의 삶이 달라집니다. [왜 예수인가] 중


실로 공감이 가는 문구였다. 나도 아프고 나서 삶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한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 우리 인간은 한정된 시간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지만 그 태도는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군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남의 불행을 괘념치 않거나 무시하기도 하고 관계를 망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 하나하나가 영원을 사는 존재라는 것을 안다면 이런 태도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하나의 영원한 존재가 우리로 인해 영원한 불못에 빠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죽음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죽음은 우리 삶의 일부이며, 그것을 무시하거나 회피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불완전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고, 더욱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죽음은 우리에게 삶의 소중함과 세상의 유한함을 상기시켜 준다. 우리가 어떻게 사는지, 우리의 행동이나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깊이 생각하게 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죽음은 오직 이 세상은 일시적인 것이라는 인식을 가져온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의미이며, 그로 인해 우리는 더 큰 의미를 찾고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종교적 시각은 삶과 죽음에 대한 더 깊은 의미를 제공한다. 죽음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의 임무와 삶의 목적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의 행동과 선택이 후세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고민하게 되며, 삶의 가치와 의미를 깨닫게 된다. 이런 세상에서의 소명이 없다면 아무리 잘 나가는 사람처럼 보여도 그 내부를 지옥이 될 수 있다. 잘 나가는 치과의사는 자신의 일을 그냥 사람들의 입을 매일 바라보는 직업이라고 스스로 비하할 수 있다. 내가 무슨 일 하는지 보다 이 일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나의 삶을 정의한다. 


이처럼 한 사람이 신앙적인 시각에서 죽음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자신의 삶을 보다 의미 있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과 선택이 하나님과 다른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고려하며,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죽음이라는 것이 단순히 육체적인 종료가 아니라 영적인 지속임을 이해하게 된다.


참고문헌

조정민 (2014), 왜 예수인가, 두란노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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