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하루

풋풋한, 따사로운 햇살

습작

by chef yosef

파주 헤이리 마을 끝자락, 조용한 산자락 아래 자리한 작은 농촌 법인회 ‘햇살들녘’.

하늘은 그곳 가공 작업장 안에서 수박 껍질을 자르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들어찬 햇살이 작업장 천막 사이로 비껴 들어왔다. 칼끝이 껍질을 따라 미끄러지면, 붉은 속살이 단정히 갈라졌다. 그 순간마다 수박 향이 짧게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마치 어릴 적 여름날의 기억처럼.

하늘은 아직 칼질이 능숙하지 않았다. 반으로 자른 수박을 다시 쪼개다 보면 꼭 한두 번쯤은 멈칫하게 됐다. 그래도 매일 조금씩 손에 익는 게 느껴졌다. 잘린 조각은 분쇄기 옆으로 옮겨졌고, 기계는 윙 소리를 내며 즙을 짜냈다. 붉은 즙이 뚝뚝 떨어져 통을 채워갔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전, 하늘은 이곳에 아르바이트를 신청했다. 큰 기대는 없었다.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이곳 헤이리로 굳이 온 건, 마음이 복잡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는, 단순한 일이 필요했다. 아무 말 없이 손만 움직이면 되는 그런 곳.

그런데 이곳에는 미솔이 있었다.

미솔은 하늘보다 두 달 먼저 와서 일하고 있었다. 가공 작업장을 담당하는 실장님은 “미솔은 손도 빠르고, 말도 참 곱다”며 하늘에게 본받으라 했지만, 하늘은 처음엔 그저 ‘일 잘하는 선배구나’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하늘이 분쇄기에 수박 조각을 넣다 실수로 기계를 멈추게 했고, 혼자 당황해 땀을 뻘뻘 흘리며 고치려 애쓰던 그때, 미솔이 조용히 다가와 스위치 두어 개를 건드리더니, 다시 기계를 살렸다.

“처음엔 다 그래. 기계가 좀 예민하거든.”

미솔이 웃으며 말했고, 하늘은 고개를 숙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날 이후로 그녀의 존재가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박 즙을 다 짜내고 나면, 미솔은 항상 컵 하나를 챙겼다. 그리고는 그날 작업 중 가장 잘 짜낸 주스를 거기에 담아 냉장고에 살짝 넣었다. 그러곤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껍질을 정리하거나 바닥을 닦았다.

어느 날, 미솔이 하늘에게 조심스레 컵 하나를 내밀었다.

“오늘 건 네가 거의 다 짰어. 한 잔 마실래?”

하늘은 순간 말이 막혔다. 땀범벅이 된 손으로 컵을 받기 민망했지만, 미솔의 눈은 웃고 있었다.

컵 안에는 투명한 거품이 맺혀 있었다. 붉은 즙이 잔잔히 일렁였다. 하늘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즙이 혀끝을 타고 스며들었다. 달콤하고 맑은 맛. 어디서도 맛보지 못한 맛이었다. 동시에 이상하게도, 가슴 한가운데가 서늘해지는 기분. 마치 그 즙 한 모금 속에 여름이 통째로 녹아든 듯했다.

미솔은 다시 작업대로 돌아갔다. 하늘은 그녀의 뒷모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햇빛 아래 살짝 구부정한 어깨, 묶은 머리에서 흘러내린 머리카락 한 줄기, 그리고 분쇄기 위에 올린 그녀의 손등 위로 맺힌 작은 물방울까지. 그 풍경이 마음속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며칠이 더 흘렀다.

미솔과 하늘은 함께 작업대를 정리하고, 즙 통을 나르고, 땀이 베인 앞치마를 함께 빨았다. 말이 많지는 않았지만, 둘 사이에는 이상하게 편안한 공기가 흘렀다. 마치 오래된 여름 친구처럼.

그러던 어느 날 오후, 파주에 소나기가 내렸다.

작업장은 천막으로만 덮여 있어 빗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미솔과 하늘은 잠시 일을 멈추고 창가에 나란히 섰다. 비는 헤이리의 들판을 적셨고, 천막 너머 산 능선이 흐리게 번졌다.

“여기, 좋지 않아?”

미솔이 물었다.

“응. 나...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왔는데, 지금은 좀 다르게 느껴져.”

미솔은 고개를 돌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뭐가?”

“사람이랑 같이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 싶어.”

미솔은 웃었다. 작고 고요한 웃음. 하늘은 그 웃음을 보고선 괜히 얼굴을 돌렸다. 창밖의 비가 멈출 기미는 없었지만, 마음은 점점 따뜻해졌다.

그날 이후로도 미솔과 하늘은 매일 같이 수박을 자르고, 즙을 짜고, 땀 흘렸다. 어느새 하늘은 칼을 다루는 법을 익혔고, 미솔은 매일 하늘에게 작은 농담을 던졌다.

여름의 절정, 8월 초.

회사에서는 지역 축제에 납품할 즙 생산을 하루 더 늘렸다. 하늘과 미솔은 이틀 연속으로 잔업을 하게 됐다. 해가 지고, 작업장을 정리하던 밤.

미솔이 수박 껍질을 정리하다 말고 말했다.

“방학 끝나면, 다시 학교 가는 거지?”

“응. 그래도 주말엔 와볼까 생각 중이야.”

“그럼, 우리 또 보겠네.”

그 말 한마디가 오래 남았다.


밤공기 속에서 들려오던 분쇄기 마지막 소리, 미솔의 웃음, 하늘의 땀냄새까지도. 모두 여름 한가운데에서 마음속 깊은 곳에 담겼다.

그리고 하늘은 알았다.

이 여름은 그냥 흘러가는 계절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게 조금 자라는 시간이라는 걸.

그리고,

어쩌면 누군가를 천천히 좋아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는 걸.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수박 주스, 이젠 더 감사하며 먹을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