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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등대지기 Apr 24. 2024

[職變] 한창 나이에 명퇴라니요

직장생활의 변곡점 [과장이지만 쫓겨났습니다]

지금 여기는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현재


 중국 출장 및 파견근무로 저는 중국에 대하여 꽤나 자세히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어도 물론 일취월장 하였구요. 그 당시 맡았던 업무인 중국시장 판로개척은 그리 녹록지 않아 결국 파견을 마치고 철수를 할 타이밍이 왔습니다. 철없던 과장이었던 저는 편안한 마음으로 한국으로 출국했습니다. 본사에 들어와 보니 그 당시 제가 속해 있는 TF팀이 해체할 것이라는 둥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문제는 늘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인사팀에서 연락이 와서 다음 귀국 때 면담을 하자고 했습니다. 안건을 물으니 현 직속상사인 팀장의 비위사실에 대한 건이라고만 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일인지 여기저기 연통을 돌려봤더니 내막이 파악되었습니다. 중국생활을 함께 했던 저희 팀과 자주 소통하던 선배께서 (그 당시에는 블라인드가 없었기에 그와 유사한) 익명게시판에 저희 팀장님에 관한 투서를 올렸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팀장님께도 전화를 드렸더니 있는 그대로만 얘기하라고 하셔서 아무 생각 없이 한국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당시 모시던 팀장님은 술을 과하게 드시곤 하셨고, 많이 취하신 경우 욕설이나 사소한(?) 폭행도 잦았던 분이었습니다. 노래방 마이크로 머리를 톡톡 때리기도 하셨고, 뒤통수는 뭐 여러 사람이 맞았구요. 저는 아니었지만 다른 동료는 뺨을 맞기도 했었습니다. 물론 잘못된 행동입니다만, 이런 행동들에 대해 저는 정식으로 항의를 했었고 그에 대해 사과를 하셨고, 그 이후로는 그런 행동이 없었기에 나름 끈끈한 팀워크를 유지하며 지내고 있었기에 다소 의아했습니다. 한창 그런 일이 있어 힘들어할 때는 다들 침묵하고 있다가 이제 어느 정도 수습하고 벌써 과거가 되어 버린 일을 들쑤셔서 누가 무엇을 얻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정치적 의도인지, 정의감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덕에 저희 팀은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인사팀 면담날짜가 되었습니다. 인사팀이 묻는 질문은 단순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냐?' 

'있었다. 그런데 그에 대해 사과도 하셨으며 이미 여러 해가 지난 일이다. 익명게시판 내용은 과장된 거다'


  솔직하게 답변을 했으나, 악마의 편집인지 모르겠으나 제가 모든 사실을 인정하고 증언했다고만 소문이 났더군요. 마치 밀고자가 된 것 같은, 늘 뒤통수에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지냈던 것 같습니다. 결국 그 팀장님은 회사에서 쫓겨났습니다. 저는 좀 당황했습니다. 나름 사내에서 라인을 잘 타고 다니시던 분인 데다, 그룹에도 근무하셨었고, 그 당시 회사를 잡고 있던 상위 대학교 출신이셨기에 별일 없으리라 생각했던 제가 어리숙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저는 팀장을 밀고해서 쫓아낸 나쁜 놈이 되었습니다. 이 문제로 한참을 스트레스받고 속앓이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가 된 듯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고 몇 달 후였습니다. 다시 인사팀에서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이번에는 또 무언가 하며 편한 마음으로 들어갔더니 제가 명예퇴직 대상이라고 통보를 하더군요. 


  이상하게도 그날의 상황이 정확히 기억이 납니다. 당시 공장이 있는 사업장에서 면담을 하였고 제가 속해있는 팀의 설비가 있는 다른 공장으로 이동하던 그 모습이 제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습니다. 뭔가 비현실적인 공간에 있는 듯했고 약간은 떠 있는 것 같고, 그러면서 시야는 많이 좁아졌었고,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은데 분노의 감정은 분명하게 느껴졌습니다. 진공 상태에 있는 듯한 그런 상태로 공장으로 이동을 하고 일찌감치 술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저 혼자만 통보를 받은 건 아니었지만 도무지 그 이유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인사팀에 이유를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니가 회사 분위기를 망친다'라는 황당한 답변이었습니다. 친하게 지내던 팀원들에게 물었더니 제가 정리 대상이라는 걸 다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한 번 더 충격을 받았습니다. 배신감도 많이 들었고요. 그렇게 저는 그 동료들과 한동안 말도 섞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저에게 알려 줬더라면,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막연한 미련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하튼 분노와 배신감에 푹 젖어, 알코올에 푹 젖어 도로 길바닥에 주저앉아 담배연기를 뿜어 대며 투레질을 하고 있었습니다. 뭔가 단단히 꼬여 버린 느낌이 들어 답답했습니다.


  제가 쫓겨난 이유를 나중에 찬찬히 복기해 보았습니다. 


  아무리 복기해 보아도 노동법상의 해고 기준에는 부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버티면 심해도 대기발령 정도일 것이고, 언제고 상황에 따라 부활은 할 수 있지 않나라는 서툰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찬찬히 따져보니 노동법을 떠나 제 직장 생활이 실질적으로는 이미 다 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 실패 원인은 대략 세 가지 정도입니다. 


  첫째, 오만방자한 삶을 살았더군요. 선후배 가릴 것 없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관철시키기 위해 달려들었고, 전혀 타협하지 않고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만행을 저지르며 살아왔었습니다. 업무 협조 관련하여 의견이 달라도 상대편이 틀리고 내가 옳다는 아집으로 모두를 공격해 댔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빨이 날카로워 다들 한 번 물리고는 이내 대거리를 하지 않아 거침없이 일을 할 수 있었네요. 

  둘째, 이전 팀장님을 보내는 과정에서 '결정적 증언'을 했다는 것이 또 있었네요. 저 윗분들도 아끼는 잘 나가던 팀장을 제 세치 혀로 인해 잃었으니 꼴 보기 좋을 리가 있을까요. 당연히 사소한 꼬투리만 있어도 보내고 싶었겠지요. 

  마지막 이유가 제가 보기엔 좀 더 합리적인 것 같습니다. 그 당시 감사가 한창이었습니다. 회사 내의 나쁜 것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과한 정의감으로 주변에서 보고 듣고 했던 것들을 성실하게 인터뷰에서 진술했습니다. 실제로 제 진술을 토대로 곤란에 처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니, 제 생각이 많이 짧았었습니다. 누구든 일을 하는 과정에서 실수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악의적으로 지속적으로 한다는 건, 그 의도가 분명하기에 충분히 잘못을 지적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순진했었습니다 그 당시의 저는. 후배들에게 매출 밀어내기를 강요하고, 힘없는 직원에게 자신의 책임을 전가하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높이 높이 올라가는 그들을 보면서 일말의 반항을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익명인 줄 알았던 그 감사라는 것이 결국 익명이 없음을, 아니 회사 내에서 하는 대부분의 익명을 가장한 설문조사가 사실 완벽한 익명일 수 없음을 알아 버렸습니다.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대리 초년차일 때 위와 비슷한 이유로 저는 회사가 많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조직문화설문에 신랄하게 답했습니다. 한 달 여 후에 사업부 기획팀장님으로부터 '너는 뭐 이렇게 회사에 불만이 많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알아챘어야 했는데,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던 게 큰 패착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행인 건 이렇게 조직에서의 쫓겨남을 겪은 이후 조금은 제가 잘못된 방식으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떠나기로 결정된 후에 주변의 한 선배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지금까지 짤리지 않은 것만도 대단한 거다'.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나름 친분도 있고 같이 동호회 활동도 같이 하던 선배인지라 그 충격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물론 맞는 말이었지만, 방식면에서는 다시 과격하지 않았나 생각하면서도, 나는 얼마나 많은 날 선 말들을 해 왔던가 반성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는 6월의 어느 날 회사에 크록스를 신고, 반바지, 반팔티를 입은 채, 선글라스를 끼고 명예퇴직 동의서에 사인을 하러 사업장에 내려갔습니다. 역시나 일부 친했던 사람들 외에는 그냥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고, 10년여의 직장생활을 그렇게 허망하게 마무리했습니다. 물론 진심으로 마음 아파해 주셨던 선배님들도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바보 같이 살았냐며 같이 눈물 흘려주던 선배, 손을 꼭 잡고 놓지 못했던 선배, 같이 울분을 토하고 개탄하던 선배까지 마냥 쓸쓸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네요. 


  확실한 건 이런 큰 일을 겪을 때 인간관계가 한 번 정리된다는 것입니다.


  친한 척하며 지냈지만 정말 작별인사 한 마디 없이 면을 돌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생각지도 못했는데 같이 마음 아파해 주던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래서 현명하게 사람을 보는 눈을 길러야 되나 봅니다. 그 이후로 저는 과잉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새로 옮긴 조직에서도 나서서 챙겨주고 하던 사람들은 이내 흥미를 잃고 떠나가거나, 심한 경우 제 말을 옮기는 경우가 있다는 것도 훗날 알게 되고 보니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이 정말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하튼 그렇게 창창한 과장 한 분이 회사에서 명예롭게 퇴직을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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