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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수 Mar 20. 2024

문틈 사이로

 ‘드르륵’ 방문이 천천히 열리고 그 사이로 얼굴 하나가 빼꼼 들어온다. 얼굴은 할 말을 머금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쳐다보기도, 나의 여전한 습관을 보곤 눈썹 사이로 주름을 만들기도, 관심을 끌려는 듯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기도 한다. 방문은 문으로써 제대로 된 구실을 못 하는 반쪽짜리지만, 빼꼼하는 얼굴 덕분에 방주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반쪽짜리 문은 네 개의 문짝으로 이루어진 쌍미닫이 문이다. 각 문짝은 나무틀과 불투명한 다섯 개의 직사각형 창으로 이루어져 있어 방음도, 빛 차단도 안 된다. 그래서 평일 새벽에도, 주말 낮에도 단잠에서 깨어나 짜증 가득하게 발로 이불을 찰 때가 많다. 심지어 문짝을 아무리 조심스럽게 닫아도 그 사이에 틈이 벌어져 나의 속을 불 지른 적도 여러 번이다.


 그래도 이 문은 우리 가족 덕분에 내 애정을 독차지하고 있다. 네 명의 얼굴이 불쑥 들어오는 순간. 그 순간 하나로 이 문은 나의 시선을 가장 많이 받고 있기 때문이다.

 엄마의 얼굴이 들어오는 순간, 나는 이 문을 가진 특혜자라고 느낀다. 엄마는 복도에서 살금살금 걸어와 웃음기 가득한 눈망울로 가운데 문짝 두 개를 살며시 민다. “배고프지 않니?” 오후 네 시, 새벽 두 시 같은 애매한 시간대에 엄마는 슬며시 물어본다. <출출한 데 간단하게 먹을 것 좀 해줘~>라는 숨은 질문에, 나는 “비빔국수나 해 먹을까? “라고 슬쩍 물어본다. 엄마는 활짝 열린 방문처럼 입꼬리 올리곤 나를 따라 부엌으로 간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이 순간을 촬영해 주는 카메라맨이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남동생을 보면, 내 눈은 찡그리지만 입은 웃고 있는 이상한 표정이 된다. 밤만 되면 네 짝의 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내 관심을 유도하는 그 아이의 행동 때문이다. 그럼 나는 응징하듯 동생 방으로 쫓아가 이불 밑으로 동생을 가두고 온몸으로 깔아뭉갠다. 다 큰 성인 두 명의 몸싸움에 부모님은 혀를 차시지만, 우리는 서로를 열받게 하기 위한 독창적인 표정을 생각해 낸다. 서로가 서로의 장난감이 되기 위해 이 문은 하나의 도구가 된다.

 적극적으로 방문을 대하는 위의 두 명과 달리 아빠와 언니는 쉽사리 방문의 순간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빠는 항상 거실에서만 맴돌다가 큰 맘을 먹었을 때 내 방으로 걸어온다. 걸음 소리는 성큼성큼이지만 그 속에 어색함이 묻어 나온다. 뜸 들인 시간이 무색하게 정작 방에 머무는 시간은 1분이 채 안 된다. 그런 아빠가 적극적으로 변하는 순간이 있다. 만취하셨을 때다. 아빠는 술을 거나하게 마신 날 거실에서부터 내 방으로 활기차게 걸어오신다. 그리고는 <네 침대는 내 거다>를 시전 하신다. 그럼 나는 힘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아빠를 침대 밖으로 열심히 밀어낸다. 아빠와 나의 10년 넘게 하고 있는 놀이이다.


 언니는 가장 낮은 빈도로 갑작스럽게 얼굴을 보여준다. 언니 방에서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는 내 방 앞으로 지나가야 하기에, 문짝의 창에서는 언니의 실루엣이 가장 많이 비친다. 대부분 빠른 걸음으로 문을 스쳐 지나가지만, 한 번씩 방문 사이로 얼굴을 보인다. 그때마다 언니는 내 눈치를 안 보는 척 큰 보폭으로 들어오지만, 빠르게 스캔하는 언니의 눈빛에서 그 누구보다 내 반응에 신경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빼꼼의 순간이 언제인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지만, 가끔 들어온 언니는 농담을 툭, 도움을 툭, 근황을 툭 던져 놓고 간다.

 언니의 툭, 아빠의 놀이, 동생의 표정, 그리고 엄마의 눈망울은 내 방문에 켜켜이 쌓여 웃음으로 변한다. 방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과 소리에 얼굴이 빨개져 자물쇠와 암막 커튼을 걸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하지만 그 충동은 매번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미닫이 문을 마주 보고 앉아 네 명의 귀여운 순간을 오래도록 목격하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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