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Will Hunting>, 1997
‘매 순간 최선을 다하라.’, ‘현재를 살아라.’, ‘지금에 충실하라.’ 살아가다 보면 자주 마주하게 되는 문장들이다.
영화, 드라마, 책 등 온갖 곳에서 쉽게 외치는 말이지만,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패와 맞설 줄 알아야 하며, 거절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난 그렇지 못한 사람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단순히 그 과정이 어렵고 힘들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력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실패하고 무너졌을 때, 그런 나의 모습을 의연하게 견뎌 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 ‘굿 윌 헌팅’ 속 주인공인 ‘윌’ 역시 그런 사람이었다. 상처받는 것이 두려워 애정을 드러내지 못하며, 실패하는 것이 두려워 주어진 기회를 스스로 내버린다.
MIT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윌의 천재적인 수학적 재능을 우연히 알아본 램보 교수는 윌에게 여러 면접 자리를 마련해 준다. 그 중 하나였던 국가 안보국에서의 면접을 일부러 망치고 온 뒤, 윌은 자신의 상담사인 숀 교수에게 그 곳에서 일을 하고 싶지 않은 이유를 줄줄이 읊는다. 그리고 평생 벽돌공으로 살아온 사람도 자식만큼은 너와 같이 좋은 기회를 얻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숀 교수에게 벽돌공도, 정비공도, 청소부도 모두 고귀한 직업이라며 언성을 높인다.
윌은 그럴듯하고 번지르르하게 말을 하지만, 정작 ‘그렇다면 너는 어디서나 할 수 있는 청소부 일을 왜 굳이 지하철까지 타고 와야 하는 MIT에서 한 것이지?’라는 숀 교수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못한다.
윌은 최고의 교수들이 오랫동안 고민하던 문제들을 단 몇 분만에 풀어내기도 하며, 하버드 대학교에 다니는 여자친구가 어려워하는 과제를 힘들이지 않고 대신 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평생 지금처럼 공사장에서 일을 하며 자신과 비슷하게 살고 있는 친구들 곁에서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재능을 키우는 일에 별 관심이 없는 척을 하며 그런 일들은 너무 쉽다며 지루해한다.
그러나 나는 윌이 겉으로는 이처럼 세상 일에 통달한 척, 관심 없는 척을 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갖고 있는 능력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고, 세상이 알아봐 주었으면 했다고 생각한다. 윌이 하필 MIT에서 청소부를 한 이유도 바로 MIT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처럼, 자신도 세상 밖으로 더 나아가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 큰 세상에 적응하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실패를 마주할 수 있다. 나는 윌이 이러한 실패가 불러올 상실감이 두려워 자신을 도와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밀어내고, 노력하는 것 자체를 기피했다고 생각한다. 청산유수로 말하는 그의 모습이 사실은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최선을 다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려는 자기 방어적인 모습이라고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윌의 모습이 꼭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물어보는 대답하기 어렵거나 싫은 질문에도 항상 능숙하고, 유연하고, 근사하게 대답하려 애쓰지만, 실상은 그저 허울 좋은 말만 할 줄 아는 윌의 모습에 내가 겹쳐 보였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나 역시 인생의 대부분의 순간에서 윌과 비슷한 태도를 취했었다.
‘너는 열심히 하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고교 시절 선생님과 부모님께 자주 들었던 말이다. 나아갈 수 있는 잠재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력하지 않는 나의 모습에 답답함을 토로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말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나를 너무 피곤하고 지치게 하기 때문에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답했었다.
전부 거짓말이었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가장 큰 이유는 아니었다. 최선을 다하는 것 자체가 나를 힘들게 하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것보다도 더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그 이후의 결과로 인해 괴로울 나의 모습을 떠올리는 일이었다.
‘정말 열심히 해봤는데도 나아지지 않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최선을 다하고 실패할 바에는 차라리 ‘잘할 것 같은’, ‘가능성이 있는’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결국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했다.
실패의 원인이 ‘내가 노력을 덜 했기 때문’에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결국 ‘만약 최선을 다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질문으로 나를 괴롭히게 되었다. 나에게 최선을 다할지, 다하지 않을지를 결정하는 일은 결과적으로는 ‘최선을 다하고 실패했을 때의 아픔’과 ‘최선을 다하지 않고 후회하는 괴로움’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과 같았던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는 ‘최선을 다하면 후회도 없다’라는 흔한 말이 전혀 와닿지가 않았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실패하게 되면 결국 ‘이럴 줄 알았으면 노력하지 말 걸’이라고 후회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모습은 결국 해낼 수 있다는 ‘기대’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생각한다.
내가 조금 더 기대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있는 힘껏 노력했음에도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조금은 덜 두려워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실패 없는 삶은 없다.
피하고 싶더라도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 상황이 올 수 있고,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보고 싶은 순간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실패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더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두려워하며 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우선 나는 쉽지는 않겠지만 삶이 뜻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사실 ‘최선을 다하고도 실패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 자체가 내가 모든 것을 잘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어쩌면 조금은 완벽주의적이고 오만한 생각으로부터 파생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최선을 다했음에도 실패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과는 별개로 ‘어차피 안 될 일에 왜 도전해?’라고 생각하는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실패를 피할 수도 없고 즐길 수도 없다면, 적어도 우아하게 하고 싶다.
앞으로 계속해서 수많은 성공과 실패들을 맞닥뜨리겠지만, 일의 성패에 따라 나의 가치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들이 뒤섞여 나에게 흡수될 때, 그제야 비로소 나라는 사람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어떤 실패는 두려워하며 한없이 슬퍼하고, 때로는 무너지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의 실패에 ‘그럴 수도 있지’라며 우아하게 대처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어떤 일은 못하지만, 다른 일은 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듯 나에게는 언제든지 다음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는, 한두 번의 실패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그런 꼿꼿하고 우아한 사람으로 나를 정의하고 싶다.
누군가는 기대를 버리면 실망할 일도 적어진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인간은 쉬지 않고 기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실패로 무너지는 기대에 고통스러울 때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멈춰서는 안 된다. 기대는 우리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패할 수 있다는 사실에 시작이 두렵다면, ‘최선을 다하면 해낼 수 있을 것이다’라는 기대를 키워 그 두려움을 감춰보자.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실패하더라도 용기를 내어 다시 기대할 힘이 있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
한계를 직면하는 것이 두려운 일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무너지지 않고 계속 기대해야 한다. 그 기대들로 인해 실망하게 되더라도, 다시 한번 더 기대해 보자. 그것이 결국 우리를 결국 자질구레한 실패들로 무너지지 않는 견고하고 우아한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