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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우 Jun 08. 2023

[순우여행노트 17] 베짝에서 벤츠까지

1990년대 초의 인도네시아 소묘

  인도네시아의 문화·지리적인 다양성 못지않게 그들의 경제사회 모습 또한 극히 다원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가벼운 여행 일정으로 자카르타(Jakarta)의 호텔이나 발리(Bali)섬의 해변 휴양지에서 며칠간 머물다가 인도네시아를 떠나는 사람이라면 인도네시아에 대한 인상이 어떨지 매우 궁금하다. 왜냐면 그 여행을 통해서는 인도네시아의 매우 크고 다양한 것 중 극히 일부분의 모습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1982년 여름 여행목적지인 호주를 향하던 경유지였던 발리섬에서 하루를 스톱오버하면서 보았던 모습을 회상해 보건대 인도네시아의 모습은 발리에서 볼 수 있는 그 이상으로 매우 복합적이고 다원적이다. “발리에 인도네시아가 있느냐?”는 우스갯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다. 인도네시아를 이야기하면서 관광으로 유명한 발리만을 떠올리는 건 거대한 인도네시아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두 번만이라도 인도네시아의 다른 지역을 여행해본다면 이 나라를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인도네시아 국기,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의 군도국가다. 160여 언어를 사용하는 다양성의 나라. 1993년 1억 8천만 명이던 인구는 2023년 2억 8천만명으로 늘어났다.

  국제적 수준의 관광호텔이나 공항의 시설, 거대한 면적의 영토와 많은 인구 규모에 상응하는 교통, 통신, 에너지, 산림 분야 등의 대규모의 공기업들, 빈약한 경제기반을 틈타 크게 세력을 넓히고 있는 여러 유형의 다국적 기업의 모습만을 본다면 인도네시아의 경제적 수준은 이미 규모의 경제를 넘어선 선진국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주요 항구 도시에는 공업단지가 속속 들어서고 도시로 몰려드는 인구의 이동 추이를 살펴본다면 인도네시아는 역동적인 산업발전이 동력을 얻고 있는 신흥공업국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거리에 나가서 또는 각 지방의 마을로 내려가서 그 모습을 살펴보면 인도네시아의 전체적인 면모는 일부 대도시와 관광지의 것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도네시아는 생각보다도 훨씬 더 경제·사회적으로 복잡하고 다원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경제·사회적인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베짝(Becak)에서 벤츠(Benz)까지’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여기에서 굳이 고급 승용차 벤츠를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베짝에 대해서는 다소의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에게 생소한 ‘베짝’이라는 말은 인도네시아식 인력거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3륜족력거(三輪足力車)라고 할 수 있다. 수레의 뒤쪽에서 발로 밟는 페달의 힘으로 두세 사람의 손님을 태운 이 수레가 앞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의 경제는 산업 시대 이전의 베짝과 같은 재래적인 형태의 탈것으로부터 세계 최고 수준의 자동차라고 할 수 있는 벤츠와 같은 교통수단이 공존하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아주 재래적인 것들로부터 최신의 첨단적인 것들까지의 폭넓은 스펙트럼의 경제가 다원적으로 혼재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연중 내내 추위를 느껴보기 어려운 열대기후라는 이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카르타 등 여러 도시 대개의 지역이 매우 평탄한 덕분에 베짝이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사랑받는 틈새 교통수단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자전거를 개조하여 이를 공공의 교통 서비스 수단으로 발전시킨 것이 베짝이다. 페달을 밟는 운전자가 뒤에 있고 두 사람 정도의 승객이 앞쪽의 좌석에서 확 트인 전면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오토바이를 같은 용도로 개조하여 대중 교통수단으로 발전시킨 것으로 바자이(Bajai)라는 것이 있다. 오토바이의 뒷좌석 부분에 승객이 탈 수 있는 상자형 좌석을 만들어 서넛 정도의 사람들이 탈 수 있게 꾸민 것이다. 한두 사람을 태울 수 있는 오토바이 동력기관의 빈약한 성능인 데다가 대부분이 노후화된 관계로 서넛의 승객들을 태우면 기관총 쏘는 소리를 내는 듯이 요란하게 거리를 질주하는 것이 마치 수도 자카르타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바자이다.      

베짝(자료: peterloud.co.uk)

  인도네시아의 지방을 여행하다 보면 도시 극소수의 부유층이 한 집에 벤츠 등 두세 대의 외제 차량을 굴리기도 하고 광대한 인도네시아 전역의 지역에 비교적 잘 연결되고 있는 항공교통의 사정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게 된다. 어느 경제사회든 그 모습이 모두 일률적일 수는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실로 인도네시아만큼 다층적인 모습을 가진 사회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울 것 같다.


  인도네시아의 어느 지방에서든지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중적인 교통수단은 중소형의 버스나 택시 등의 현대적인 수단을 제외하고도 말이나 당나귀 따위를 이용한 수레바퀴 형태의 운송수단이 예전에도 그래왔던 것처럼 이제껏 아주 자연스럽게 활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바섬의 중남부에 자리한 교육문화 도시라고 할 수 있는 족자카르타(Yogyakarta)에서는 안동(Andong)이라는 말이 끄는 수레를 많이 볼 수 있다. 발리섬의 동쪽에 위치해 있는 롬복(Lombok)이라는 섬에서는 도카르(Dokar) 또는 치도모(Chidomo)라고 불리는 마차가 시골 마을 지역의 주요 운송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수레는 바퀴가 자동차의 타이어를 이용하고 있어서 보통의 수레바퀴에 비해서는 승차감이 좋다는 것이 커다란 장점인 듯해 보였다.

도카르(자료: review.bukalapak.com)

  이렇듯 기계적 힘이나 동물의 힘을 빌려서 탈것이라는 도구를 이용하는 것은 그나마 문물이 앞선 지역의 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자바섬 동북부 지역의 브로모(Bromo)라는 화산 있는 지역에 조랑말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땅글(Tengger)족 사람들, 그 외에도 많은 지역의 사람들은 이러한 동물의 힘에 의존하거나 아니면 순전히 도보라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 경제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산업화 정책에 힘입어 공업, 에너지, 관광 등의 산업 분야에서 많은 발전을 이룬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체 산업에서 차지하는 제조업의 비중이 20%를 넘어섰으며 1인당 평균의 국민소득도 빈곤의 수준을 벗어난 600달러를 넘어서서 이른바 중저소득국가(Low Medium Income Country)의 하나로 발돋움하고 있다.


  1994년부터 시작되는 인도네시아 정부의 제2기 25년 장기개발계획(PJPⅢ)과 제6차 5개년개발계획은 2000년까지 1인당 국민소득을 1,000달러 수준으로 끌어올리며 자국의 경제사회발전을 도약단계로 진입시키겠다는 목표를 세워놓고 있다. 이와 같은 목표는 근년의 비교적 안정적인 발전 추세로 보아 현재와 같은 정치·사회적 안정이 유지되는 경우 그 목표 달성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인도네시아가 동남아시아지역의 경제협력협의체인 아세안(ASEAN)의 역내 경제통합을 주도하고 있으며 아시아태평양지역 협력체인 에이펙(APEC) 등과의 무역 투자 분야 협력에도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는 등 자유시장 경제의 발전에 능동적인 자세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또 다른 시각에서 인도네시아의 경제·사회적인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면 인도네시아가 처해 있는 현실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인도네시아의 산업생산이 빠르게 증가하고는 있지만, 제조업체 근로자의 최저임금 수준이 일 3,800루피아(Rp)로 월 임금이 50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임에 의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전체 인구의 17%에 해당하는 2,700만 명의 인구가 절대빈곤 인구라는 큰 짐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전체 노동인구의 38%가 사실상 실업이라고 할 수 있는 잠재실업의 상태에 있으며 도시 중심의 개발에서 오는 도시와 농촌 간의 개발격차 또한 더욱 크게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가 저임의 풍부한 노동력과 다양한 천연자원의 혜택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250만 명씩 증가하는 신규 노동인구를 흡수할 수 있을 만큼 안정적인 성장의 엔진을 가동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또 전체적으로 무난한 성장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구 성장의 과실이 비교적 균형되게 배분되고 재투자되어 그것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른바 ‘지속이 가능한 개발(Sustainable Development)’로 이어지게 될지는 쉽게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현재 인도네시아는 20년 이상의 장기집권을 계속해온 수하르토(Suharto) 대통령이 아직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수하르토 정부의 가장 강력한 지지기반이자 정치적 배후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군부의 변함없는 뒷받침으로 무난하게 정치·사회적인 안정을 유지해 나오고 있다. 현 수하르토 정부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비대해진 기존의 정치세력에 대한 비판이 조심스레 흘러나오기도 하고 수하르토 가문의 경제적 이권개입 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공공연하게 거론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수하르토 대통령은 그 특유의 유화적이면서도 권위주의적인 리더십으로 다양한 욕구가 커지기 시작하는 인도네시아 사회를 별 무리 없이 이끌어가고 있다. 그는 독자적인 민항기개발 프로젝트 등과 같은 국가적 프로젝트를 추진하는가 하면, 1994년 11월에 자카르타에서 개최토록 예정된 아시아태평양지역협의체 에이펙(APEC) 제2차 총회를 인도네시아의 발전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고 향후 보다 적극적인 대외개방과 협력의 계기로 삼겠다는 의욕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때로는 대담하기도 하고 때로는 현실적인 실용주의적 전략을 펼쳐나가면서 더욱 격상된 지위의 인도네시아에 대한 미래를 설계해 나가고 있다.     


  그러나, 거리를 나란히 달려가고 있는 베짝과 벤츠를 지켜보면서 과연 그들이 설정해놓고 있는 목표를 슬기롭게 달성할 수 있을지 가늠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베짝의 속력에 속도를 맞추어 벤츠가 달려가려면 그 속도가 너무 느릴 테고, 벤츠가 베짝이 달려가는 느린 속력에 속도를 맞추어가려면 한없이 느린 속도로 갈 수밖에 없는 게 인도네시아의 경제 현실이 아닐까? 더더구나 몇 대 되지 않는 벤츠로 그 많은 인도네시아의 사람들을 무리하게 태우려 한다면 아마도 그 자동차는 출발 자체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베짝이나 바자이, 안동이나 도카르에만 의존할 수 없는 것 또한 인도네시아가 당면한 경제 현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인도네시아의 경제와 미래를 쉽게 가늠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야윈 어깨 모습을 드러내놓고 느리고 느리게 운전을 하면서도 그들의 얼굴에 결코 미소를 잃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서 인도네시아의 어둡지만은 않은 미래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인도네시아의 폭넓은 다양성과 극히 다층적인 다원성이 때로는 충돌과 지체의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테지만, 더욱 긴 안목에 본다면 그것들은 인도네시아를 더욱 역동적이고 풍요로운 사회로 변모시켜나갈 수 있는 귀한 동인이 될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199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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