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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lopenspirits Apr 24. 2024

안 오는 줄 알았어

휴직 113일 차

     오랜만에 집 밖을 나서려 현관문을 여니 문 앞에 박스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올 게 없는데, 내가 뭘 또 주문했나 아니면 엄마가 반찬을 보냈나 하면서 상자를 내려다보니 그건 바로 롬복에서 온 택배였다. 짐을 줄이고자 셍기기에서 한국으로 약 5킬로의 짐을 포장해서 보냈다. 여러 배송 옵션이 있었는데 가장 싼 옵션을 선택했다. 한화 약 5만 원에 최장 45일이 걸리는 배송일정이었다. 3월 1일에 보냈으나 45일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길래 포기하고 있었다. 영원히 집으로 배달이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예상치 못하게 마주한 박스는 최초에 내가 포장한 것 이외에 겉에 여러 겹 비닐 포장이 돼있었고 송장도 여러 개가 붙어있었으나 글자는 모두 다 지워졌다. 글자가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주소를 알고 찾아왔는지 신기할 뿐이었다.


     상자를 열어보니 물건들이 마치 진공포장 된 거 마냥 납작하게 눌려있었고 이유는 모르겠으나 약간의 습기가 차있었다. 아마 배를 타고 온 것 같은데 비를 맞거나 지하창고에 오래 있다 보니 축축해진 것 같다. 물건을 하나하나 꺼냈다. 여행을 떠날 당시는 한 겨울이었으나 인도네시아는 더웠기 때문에 경량패딩과 장갑을 돌려보낸 건 당연했다. 가방도 두 개나 있었다. 혹시나 사용 중인 휴대폰을 잃어버릴까 봐 공기계도 하나 들고 갔었는데 그것 역시 짐일 뿐이었다. 그 밖에 탑, 밀짚모자, 수영복, 셀카봉, 양말, 브라, 폼클렌징, 마스크, 레깅스, 샌들 등이 들어있었다. 옷들은 다 꺼내서 세탁기에 집어넣었다. 깨끗한 상태로 부쳤지만 두 달 동안 어딜 돌아다녔을지 모르니까 한번 더 빨아야 한다.


     안 올 거라 생각하면서 그 안에 넣었던 물건들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리고 다 합쳐서 얼마인지도 계산해 봤다. 가장 아깝다고 생각한 건 의외로 수영복이었다. 다시 수영장에 등록하면서 강습용 수영복이 필요했는데 짐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그리고 안 올 거라 생각해서 새로운 수영복과 수모를 구입했는데 그 돈이 너무 아까웠다. 옷 중에서 검은색 상의도 떠올랐는데 한쪽 어깨가 가느다란 끈으로만 되어있는 원숄더오프탑이었다. 비싸진 않지만 좋아하던 옷이라 같은 걸로 다시 사려고 인터넷 쇼핑몰 구매완료 페이지를 통해 다시 들어가 봤는데 품절되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재구매에 실패했었는데 오늘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쁘다. 올여름 내내 입어야겠다.


     상자 안에 물건을 하나씩 넣을 때는 영영 잃어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물건만 넣었다. 정말 아끼는 것들은 아무리 무거워도 캐리어에 들고 다녔다. 아쉽지 않다 생각한 물건들이었지만 바다 한가운데에 떠다니지 않고 서울까지 도착한 걸 보니 행복했다. 다시 받지 못해도 상관없었지만 다시 보니 아니었다. 그때는 상황이 그래서 버림받은 아이들이지만, 장소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니 필요해졌고 그리웠다. 오늘 내가 마음속으로 완전히 버린 것들도 언젠가 다시 닿고 싶은 날이 올까?


     한 가지 궁금한 건 엽서다. 나 이외에 네 명에게 엽서를 보냈는데 그중 세명은 모두 받았다고 했다. 왜 나는 아직 받지 못했을까? 내게 쓴 엽서는 어디를 헤매고 있는 거지? 현관 앞에 놓인 박스를 봤을 때 엽서도 같이 왔을 거라 생각했지만 없었다. 내가 정말 받고 싶은 건 박스보다는 엽서였다. 게스트하우스 작은 책상에서 나는 오늘의 나를 봤다. 45일 후의 나라면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지가 너무나 상상가능했다. 그런 나를 위해 짧은 글을 썼다. 지금 나에겐 그때의 내가 보낸 위로가 너무 절실하다. 하지만 엽서는 오리무중이다.


     사실 엽서에 뭐라고 썼는지 알고 있다. 너의 환경과 하고 있는 일, 상황 그 어느 것도 기대만큼 바뀌지 않았다고 실망하지 마. 이곳에서의 너와 서울에서의 너는 겉으로는 같아 보일지 모르겠지만 곰곰이 살펴보면 많은 것이 이미 바뀌어 있으니까. 대충 뭐 이런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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