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elopenspirits Apr 28. 2024

엽서

휴직 117일 차

     인왕산 둘레길을 걸으면서 유튜브를 들었다. 처음에는 명상으로 검색해서 관련 콘텐츠를 듣고 있었는데 그다음 재생목록으로 알고리즘이 반야심경 요약을 들려주었다. 반야심경은 불교의 철학을 한 권으로 요약한 책인데 그중에서도 핵심은 '오온이 공하다'라는 문장이다. 오온은 사람의 다섯 요소, 색수상행식 (식별-느낌 연상-감정-인식)을 말한다. 공하다의 공은 많이 들어봤듯이 빌 공 空이다. 즉 사람과 세상의 다섯 요소는 비었어있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은 강아지를 보고 귀엽다고 생각하지만, 어릴 적 강아지에 물린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은 같은 강아지를 보고도 무섭다고 느낀다. 강아지 예와 같이 사람마다의 오온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개인 수준의 오온변화에 따라서도 같은 현상을 다르게 받아들인다. 원효대사의 해골물 에피소드를 생각해 보면 그렇다. 세상만물이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는 교훈을 말할 때 원효대사 해골물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불교에서 말하고자 한 바는 그것이 아니다. 비워져 있는 오온을, 그 비워진 틈을 우리 마음대로, 희망과 망상으로 채우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를 그림판 스포이드로 찍어보면 7가지 색사이에 갈색, 검은색 등등 다양한 색이 있다. 우리가 떠올리는 빨강과 주황, 주황과 노랑, 노랑과 초록 그 사이가 空이며, 7가지 색 이외의 다양한 색이 나올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空이다. 빈칸 안에 어떤 답을 채워놓으면 무수한 가능성을 놓치고 착각의 세상이 펼쳐질 뿐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문을 품을수록 다양한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무지개를 70가지 색으로 그리지는 않을 것이다. 빨주노초파남보로 무지개를 그리는 사람에게 가서 왜 그 사이의 색들을 보지 못하냐고 다그치치도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인간인식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空은 믿음이 아니다. 空은 신념을 깨는 것이다. 무지개가 일곱 가지 색이라는 믿음, 눈앞의 이익이 행복이라는 믿음, 돈이 최고라는 신념을 넘어서서 그 너머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空이다.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편함을 들르니 그토록 기다리던 엽서가 와있었다. 롬복에서 나에게 보낸 엽서였다. 내가 나에게 쓴 글인데도 다시 읽으니 코끝이 찡했다.


    "발리, 길리, 롬복을 떠나 서울로 돌아간 너의 일상이 그다지 변하지 않았더라도, 너의 각오와 예상이 무색하게 그대로 일지라도 그냥 그렇게 보일 뿐, 많은 것은 달라졌고 또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는 걸 언제나 기억하도록 해"


    어쩌면 나는 空이라는 빈칸에, 변화라는 걸 채우고 싶었고, 그 변화라는 빈칸에는 [이직] [퇴사] [여행] [사업]과 같은 단어가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두 달 전의 나는 긴긴 여정 끝에 돌아간 현실에서는 그렇게까지 드라마틱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걸 미리 알았나 보다. 또 여전히 지겹도록 같은 챗바퀴를 돌고 있는 스스로를 지켜보면서 자괴감에 빠질 것이라는 것도 영리하게도 예측했었나 보다.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고 아직도 억지로 톱니바퀴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나에게 실망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면서도 원효대사의 해골물 st.로 모든 건 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같은 장소, 같은 사람, 같은 상황이라도 내 눈의 렌즈를 바꿨으니 달라진 것과 진배없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던 나였다. 오온의 컬러가 레드에서 블루로 바뀔 거라고 말이다.


    空의 자리에 기어이 변화를 끼워 넣어야겠다면 그 변화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무지개가 색의 조합이 아닌 사실은 빛의 반사와 굴절이라면 변화의 본질이란 건 뭘까. 직업을 바꾸고, 회사를 옮기거나 그만두는 게 일곱 색이라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과 신념을 깨고 본질적으로 도달할 空의 깨달음, 거기엔 무엇이 있을까? 변하고 싶다는 건, 그대로이기 싫다는 건 근본적으로는 현재보다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희망을 투영한 회피이다. 현재보다 성장하고, 현재보다 독립적으로 살 수 있고, 현재보다 더 많은 자율성을 얻고, 현재보다 행복할 방법만 있다면 굳이 직업을, 회사를, 인간관계를, 주거지를 바꾸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물론 앞서 말한 요소들의 교체가 이뤄지면 성장과 독립과 자율성과 행복이 저절로 따라올 수도 있다. 운이 좋다면 한 가지만 바뀌어도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운이 나쁘다면 모든 걸 다 바꿔도 아무것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고민해야 하는 건 어떤 타이틀로 갈아 끼울 것인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니던가. 어떻게 해야 발전하고, 일희일비하지 않고, 인생을 주도하여 충만하게 살지를 고민하는 것이 선행돼야 하는 거 아닌가.


    집으로 오는 길에 이런 생각을 했다. 이제 평일 백수놀이는 끝이 났구나. 회사를 가더라도 주말에는 꼭 시간을 내서 오늘처럼 산책도 가고 책도 읽어야지. 다음 주는 집에서 좀 더 일찍 출발해서 청운도서관 문 닫기 전에 들러봐야지. 일주일에 한 번은 꼭꼭 하고 싶은 걸 하면서 행복해야지. 지금까지는 시간이 넘쳤지만, 앞으로는 자유시간이 없으니 기회가 생기면 무조건 좋아하는 걸 할 거야!


    서울에 도착한 지 두 달 차. 엽서도 두 달을 헤매었다. 엽서와 나 둘 다 시간을 유랑했지만 아무것도 변한 건 없다. 그렇지만 모순적이게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서 기를 쓰고 행복할 방법을 찾고 있다. 모든 게 그대로여서 또는 그대로 일거 같아서, 시간을 쪼개어 살면서 어떻게든 안온을 모색하고 있다. 바뀌면 행복할 거라는 건 착각이라고, 오온이 공하다에 반하는 것임을 알려주려고 하필이면 오늘, 영원히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한 엽서가 도착한 건지는 신만이 알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바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