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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lopenspirits May 18. 2024

거대한 연필을 쥐고

리플리 ㅣ Anthony Minghella

    같은 꿈을 반복한다.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바로 어마어마하게 큰 연필을 안고 있는 꿈이다. 자는 동안에는 그것을 연필로 인지하지만, 깨어나 곱씹어보면 그건 나무로 만들어진 연필이 아닌, 연필로 기능하는 나무에 가깝다. 너무 큰 나머지 손가락 사이에 끼울 수 없다. 두 팔을 한껏 열어 감싸 안아도 두 손 끝은 닿지 않을 정도로 두꺼운 대를 가지고 있다. 두꺼운 만큼 심 역시 뭉툭하다. 연필깎이로 정교하게 깎인 연필심을 상상상하면 안된다. 심이란 것은 그저 도끼로 툭툭 쳐내 노출만 시킨 흑연이라고 보는 게 맞다.


    낑낑 거리며 연필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한 글자는커녕 한 획이라도 그을라고 하면 온 수면시간을 다 써야 한다. [가]를 쓰려고 첫 획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여보지만 시도에 불가하다. 그건 마치 내적댄스와 같다. 마음속으로는 둠칫둠칫 리듬을 타고 있지만 겉으로는 아무 티가 안나는 것처럼 거대한 연필을 안고 긴 서사를 적어 내려가고 싶은 희망 역시 밖에서 보면 그저 점 하나를 겨우 찍어 낼 수 있는 작은 움직임뿐이다. 






If I could take a giant eraser and rub out everything, 
starting with myself.

          


    끔찍하고 해롭고 어둡고 악마 같은 과거의 일을 지하실에 넣고 문을 잠가버렸지만 특별한 사람을 만나면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라며 지하실의 열쇠를 주고 싶다는, 하지만 그 밑바닥이 너무 더럽고 추해서 차마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주인공 리플리의 말은 왜 그가 하필이면 지우개를 말했으며, 가장 먼저 자신부터 지우고 싶다고 했는지 납득하게 한다. 


    큰 지우개는 꿈속 나의 연필과 마찬가지로 아무리 어깨를 열고 집어보려, 양팔과 두 다리를 이용해서 밀어보려 애써도 바위처럼 꿈쩍하지 않는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기만 하면 선이 그어지는 연필과는 달리, 이쪽에서 저쪽으로 다시 저쪽에서 이쪽으로 여러 번 왕복해야 글자를 지울 수 있는 지우개의 원리를 생각해 본다면 쓰는 것보다 지우는 게 훨씬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거대한 지우개는 그만큼 표면적이 클 것이기에 일단 움직일 수만 있다면 한꺼번에 모든 걸 백지상태로 만드는 게 가능할 테니 정말로 들키고 싶지 않은 내용이 있다면 도전하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지우개로 자신부터 지우겠다는 리플리의 다짐과 달리 큰 연필을 쥐고 무언가를 쓰려고 애쓴다. 모든 걸 한꺼번에 삭제할 수 있는 지우개와 대응해 모든 걸 한 번에 세세하게 쓸 수 있는 연필이 주어진다면, 리플리가 자신을 지우고 싶다는 것과는 완전하게 반대로 나에 대해 쓰고 싶다. 아무리 기를 써도 겨우 한 발짝을 쓸 수 있는 소중한 한 획이라면 자신에 대해 써내려 가고 싶다. 꿈속이나 현실이나 리플리의 지우개는 자신을 절대 지울 수 없지만 현실의 연필로는 마음껏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다. 물론 사실은 연필이 아닌 키보드인 경우가 많지만 말이다. 



The Talented Mr. Rip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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