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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밍 Dec 23. 2022

할머니가 되었어요?

달님 작가님과 함께한 글쓰기 수업에서

안녕. 저는 2022년 10월 10일의 허민지입니다. 반가워요. 나이 계산에 관심이 없는 당신을 위해 꼭 짚어 알려 줄게요. 저는 지금 만으로 31살입니다. 어여쁜 나이이지요? 혹시 이 편지를 쓰기로 결심했던 때가 기억나나요? 한 시절의 나에게 편지를 써보는 글쓰기 과제를 받았어요. 그런데 도무지 과거의 나에게는 딱히 해주고 싶은 말이 없더라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내가 썩 마음에 들어서 과거와 미래의 나에게 관여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 편지는 죽음을 앞둔 나에게 보내는 편지예요. 당신은 지금껏 살아온 세상과 곧 작별하게 될 거예요. 남아있는 모든 것과 안녕하는 거죠. 지금도 ‘안녕’이라는 단어를 가장 좋아하나요?


당신에게 질문하고 싶은 게 많아요. 물론 답을 들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지금 내가 하는 질문에 대해 당신이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할 것 같아요. 가장 하고 싶은 질문은, 할머니가 되었어요? 그다음은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볼게요. 자녀는 있나요? 지구는 어떻게 변했어요? 전쟁은 사라졌고요? 부모님과는 헤어졌나요? 모쪼록 지금보다 다정한 시간을 보냈을 거라 믿을게요. 우리 언니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언니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언니가 아프면 마음이 찢어져요. 조카가 어떤 사람으로 자랐을지도 궁금하고요. 그리고 혹시 제게 파트너가 있나요? 존재하는지 궁금해요. 평생 사랑이 가장 중요했잖아요. 나는 용기를 냈나요? 참, 요즘은 어떤 일상을 만들고 있어요? 친구들과 이웃으로 지내고 있고요? 저는 요즘 집을 구하고 있는데 어렵네요.


당신은 어떤 소개 문장이 붙여지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최근에 친구가 영상을 찍으며 제게 자기소개를 부탁하길래 “안녕하세요. 살아있는 허민지입니다”라고 소개했어요. 너무 진실하죠? 제가 초등학생 때 2학년 4반 정직반이었잖아요. 이래서 교육이 중요해요. 사실 이 편지를 쓰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할머니가 되었는지 궁금하기 때문이에요. 알다시피 2022년에 저는 수술을 받았잖아요? 코로나 바이러스에 난리법석인 상황이라 어쩌다 보니 보호자도 간병인도 없이 고생 좀 했고요. 몸과 마음 잘 쓰고 있나요? 아니, 몸과 마음 잘 쓰셨나요? 괜히 양심에 찔려서 고백하건대, 지난 9월부터 너무 바빠서 머리로는 ‘안 되는데..’ 생각을 하며 계속 몸을 쓰고 있어요. 미안해요. 어쨌든 개선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사랑합니다. 이 한마디로 퉁 쳐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랑해요. 그리고 여전히 불안해요. 혹시 할머니가 되지 못하고 죽어버리진 않을까…… 이 편지를 언제 받게 될까요?


영정사진이랑 유언장은 준비했죠? 올해 초에 만들어 둔 목표였는데, 일단 저는 아직 안 했어요. 대신 다른 목표들을 여러 개 성공했어요. 우리 밴드 유라시아 공연하기, 필사하기, 생리대 정기후원 시작하기. 책 만들기는 아직 진행 중이고 연말에 결과물이 나올 것 같아요. 유라시아 LP는 테스트 판이 한국에 도착해서 들어보고 있던데 저는 아직 못 들어봤고요. 100일 챌린지는 특별히 하고 싶은 게 없어서 못 정하다가 이제는 올해가 100일도 안 남아서 깔끔하게 내년에 해보려고요. 영정사진이랑 유언장... 일단 사진은 12월에 시간 내서 한 번 찍어 볼게요. 유언장은 랑이네 놀러 가게 되면 그때 써보면 좋겠네요. 와. 이제 나는 정말 죽는군요.


당신의 사랑이 정말 궁금하고 걱정돼요. 요즘 저는 용감했던 모습은 다 잃어버리고 지치고 나약해졌거든요. 지친 건 사랑이 나타나면 자연스럽게 회복하겠죠. 알아요. 그런데 용기는 잘 모르겠어요. 앞으로 제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될까요? 저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요.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될까요? 에잇.


허밍. 곧 숨을 다할 나에게 너무 질문만 한 것 같아 미안해요. 지금의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애꿎은 당신께 후두두 쏟아낸 것 같아요. 혹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면 이 편지를 덮어도 좋아요. 당장 덮고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나는 정말 좋아요. 앞으로 제가 할 말은 당신이 평생에 걸쳐 제게 들어왔을 테니까요. 아무튼 지금의 나도 최선을 다해 이 시간을 써볼 테니, 마저 적어볼게요. 나는 당신의 마음이 좋았어요. 당신의 눈물도 다 껴안아 주고 싶었고요, 당신이 가장 웃겼어요. 당신이랑 지내는 게 때로는 피곤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사랑하니까 그 마저도 웃기고 즐거웠어요. 결국 당신과 함께 지낼 수 있어서 여기까지 이렇게 온 것 같아요.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이만하면 아주 잘했어요. 만나서 기뻤어요. 안녕!


추신. 갑자기 편지가 끝나서 놀랐죠? 난 이제 잘 거예요! 당신은 어서 가서 남은 시간을 쓰세요! 가!


2022년 10월 10일 당신의 허밍, 허민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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