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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tebook Dec 29. 2022

처음 만난 친구들

동네친구

 아른한 기억의 첫 장은 1988년 12월 내 나이 6살이 지나갈 무렵의 겨울이었다.


하늘에서 하얀 눈이 펑펑 내리며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 게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날은 정말이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펑펑 쏟아져 내리는 게 너무도 신기했다. 슬로비디오 같은 모습으로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그렇게 깃털 같은 눈송이는 소리 없이 쌓여갔다. 분명 너무도 추운 날씨였음은 분명했지만 느낀 감정은 포근하고 따뜻했다.


아이의 본능이랄까, 집안에서 보고 있자니 참을 수 없어서 집 밖으로 뛰처나갔다. 흙바닥에 소복이 쌓인 눈을 힘껏 안으며 하얀 겨울을 만끽했다. 흙과 눈이 섞여 나의 옷은 점점 진흙 범벅이 되어 갔지만 개의치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놀다가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보니 누군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와 또래로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낡고 해진 갈색 코르덴바지와 추워 보이는 윗옷 하나만 걸치고 똘똘하게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날 보러 온 건 아닐 테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눈과 흙 그 자연과의 교류를 계속 이어갔다. 그런데 그 아이는 내 앞에 멈춰 서서 약간은 뻔뻔하게 같이 놀자며 말을 건넸다. 나는 집에서 아빠와 엄마 말고 다른 사람과는 처음 하는 대화였다. 나는 경계심 없이 물었다.


"너 누구야?"

"안녕, 난 저~기 밑에 사는 동진이라고 해.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네가 보여서 올라와 봤어."

"어.... 안녕."

"난 6살이야 넌?"

"6살? 나도 6살인데.... 난 상문이라고 해, 여기가 우리 집이야"

"아.... 여기가 너희 집이구나.... 여기까지 올라와 본건 오늘이 첨이야. 같이 놀아도 될까?"

"응, 좋아"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친구가 생겼다.

간단한 인사를 하고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함께 눈을 모아 눈사람을 만들며 시간을 보냈다. 그날은 점퍼도 장갑도 없었지만 해가 질 때까지 추위와 배고픔 따위는 느낄 수가 없었다.

 

동진이는 키가 좀 작았다. 하지만 운동신경이 좋고 머리 또한 비상했다. 우리가 놀이할 때면 구체적인 방법을 항상 제시했고 호기심이 생길 때면 과감하게 도전하는 믿음직스러운 녀석이었다.


우리 동네는 산으로 가는 중턱에 자리 잡은 비탈진 밭 동네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대부분 밭으로 둘러싸여 있고 밭 중간중간에는 허수아비가 있기도 했었다. 밭들은 각각의 소유에 따라 초록색 그물망으로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거나 듬성듬성 고랑이 있어서 밭의 경계를 알 수 있었다. 동네에는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았다. 대부분의 집은 오래된 슬레이트 지붕과 기와지붕이 섞여 있었고 집에는 개 한 마리씩은 있는 가난한 밭동네였다.


그중에 우리 집은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었고 딱히 집에 사람이 찾아온 걸 본 적이 없다. 더욱이 동네에는 가로등이 하나도 없어서 밤이 되면 으슥하고 무서운 느낌이 드는 그런 곳이었다. 매일 잠에서 깨면 집 앞 흙바닥에 앉아서 지나가는 개미와 거미를 보며 놀다가 집에 들어가고를 반복했던 삶에 처음 친구를 만난 것이다.


그렇게 친구를 만난 후 첫겨울이 지나고 집 앞에 조그마한 도랑으로 산에서부터 물이 졸졸졸 흐르는 따스한 봄이 왔다. 처음에 대부분은 동진이가 우리 집 앞으로 먼저 놀러 왔다.

"상문아 놀자~"


아침이면 항상 들려오는 목소리다.

우리는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매일 만났다. 매일 집 앞에서만 놀던 나는 동진을 만난 덕에 우리 동네 구석구석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집 뒤로는 조그마한 등산로가 하나 있다. 등산로는 어른 한 명이 걸을 정도의 폭이었고, 등산객이 없어 길이 고르지 못했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았고 곤충이나 벌레들이 많아서 놀기에 좋았다.


그러다 어느 날은 등산로가 시작되는 첫 계단에 앉아서 나뭇가지로 개미굴을 파고 피난하는 개미들을 흙과 함께 마구 잡아들였다. 우리는 각자 준비한 투명한 베지밀 병에 개미를 잡아넣고 키울 심산이었다. 그렇게 희망찬 생각으로 개미 군단을 만들 때 즈음에 저 아래쪽에서 아이 두 명이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우리 앞에 다가와 키가 조금 크고 불량해 보이는 아이가 말했다.


"야 너희들 비켜, 못 가잖아."

"너 뭔데? 우리가 먼저 놀고 있었거든, 다른 데로 가"


내가 대꾸하며 일어났다. 그러자 그 녀석은

"뭐라고? 이게 돌았나?"라고 중얼거리듯 말하면서


발길질로 배를 찼고 뒤통수를 두어 번 주먹으로 내리쳤다. 나는 순간 앞이 보이질 않았고 숨이 몇 초간 쉬어지질 않았다. 당황스럽고 화가 치밀어 나도 공격을 시도했다. 머리는 맞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그 녀석 얼굴을 향해 수많은 주먹 난사를 해댔다. 입으로도 힘이 쌔 질 거 같은 방언을 구사하며 말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녀석은 한 대도 맞지 않았다. 이윽고 눈앞이 검은색으로 변하더니 시야가 선명해질 즈음에는 바닥에 누어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씩씩하게 다시 덤벼 보려 일어났지만 그 녀석 눈을 본 순간 녀석에게 이길 수 없음을 몸이 먼저 느꼈는지 움직이질 못했다. 그 짧은 시간에 이미 서열은 정해졌고 그걸 몸이 벌써 습득하고 반응한 것이다. 나는 너무 화가 났지만 몸이 시킨 데로 그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꽉 문채 씩씩 거리며 그 녀석을 쳐다보기만 했다. 약간은 미안한 눈빛으로 녀석이 말했다.


"그러니깐 비켜라고 했을 때 그냥 비키면 좋았잖아. 꼭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너희들 몇 살이냐?"

"7살..이다.."

"난 9살이니깐 너희들 보다 형이다. 앞으로 말 잘 들어 알았어? 어린것들이 반말하지 말고. 한대 더 맞고 싶면 또 개겨보던가."


그 녀석들은 사실 그 길을 지나가려고 나와 동진이를 나오라고 한 것이다. 길이 너무 좁아서 우리가 비켜줘야 했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이성적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녀석들이 우리의 개미를 약탈하러 왔다고 느껴졌고 그 순간 개미는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이었기에 감정대로 말이 먼저 튀어나왔을 뿐이었다.


우리 동네 사는 기준이와 기석이 형을 처음 만난 순간이다.


기석이 형은 국민학교 또래들 사이에서 일명 '통'으로 불렸다. 학교에서 싸움을 가장 잘하고 가장 불량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를 꽤나 아끼고 특별하게 생각했다. 깡좋게 자기에게 덤빈 녀석은 내가 처음이라고 입버릇처럼 주변에 말하고 다녔다고 한다.


며칠 뒤 동진이와 나는 여느 때처럼 개미 육성을 위해 개미굴을 찾아다녔고 동네에서 가장 큰 나무가 있는 곳에 아주 좋은 곳을 발견했다. 각자 나무 주변에서 구멍파기 좋은 나뭇가지 하나씩 주워와 마음에 준비를 할 찰나 나무 뒤로 누군가 보였다. 얼마 전 나를 폭행했던 기석이 형 동생 기준이었다. 기준이는 우리와 나이가 같았다. 나는 그때의 일은 벌써 잊었고 기준이 녀석도 혼자 있는 거 같아 뭐하는지 물었다.


"야 너 여기서 뭐 해, 나 알지?"

"어.. 넌 그때.. 난 여기서 개미 잡고 있는데.."

"어라? 우리도 개미 잡으러 왔는데, 얼마나 잡았어? 보여줘."


그날 이후 우린 2명에서 3명이 매일 만나게 되었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우리 집에서 밭 3~4개 정도 아래로 내려가면 기준이 집이 있었고 그 밑으로 동진이 집이 있었다. 그래서 기준이와 함께 한 이후부터 내가 아침에 기준이 집을 먼저 들리고 동진이 집까지 돌면서 친구들을 불러냈다.


기준이는 포근한 인상에 약간 통통했다. 성격도 순진해서 자신의 말보다는 친구인 우리의 말을 많이 들어주었다. 나와 동진이는 가끔 의견 충돌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기준이는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다. 공부를 매우 싫어했고 성격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똑똑한 편은 아니었다. 아니.. 그때는 그랬다고 생각했다.


기준이를 어떻게 만났건 중요하지 않았다. 낡고 허름한 집들이 모여있는 그 동네에서 나와 동진이, 그리고 기준이도 서로를 만나기 전까지는 외톨이였고 친구들과 함께 하는 즐거움을 몰랐기에 친구가 된 그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오늘 보다 내일이 더 즐거울 것이란 걸, 그걸로 우린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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