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8살이 되던 해 3월,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쌀쌀한 바람이 여전히 몸 구석구석을 괴롭혔지만 입학식의 설렘은 따스한 봄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딱딱한 황토가 어느 정도 다져진 넓은 운동장에서 수백 명의 아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였고 질서를 바로 잡는 교사 몇몇은 아이들을 하나, 둘 단상을 향해 줄을 세우기 바빴다. 눈앞에 흙먼지가 가라앉을 즈음에 라디오에서나 들릴법한 목소리로 교장은 입학식을 진행했다. 나는 1학년 3반, 동진이는 7반, 기준이는 9반 이렇게 각자 다른 반으로 배정이 되었다.
입학을 하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은 많은 아이들이 유치원을 다니고 왔다는 것이다. 나는 유치원을 다니지 못했다. 동네 친구인 기준이도 동진이도 사정은 똑같았다. 부모님들은 생계유지 하기도 힘든 시기였고 그분들 세대에는 유치원이라는 곳은 중요한 곳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치원을 가려면 별도로 입학 신청을 해야 하는데 배정된 인원이 적어서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이유는 많았지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이었을 것이다.
입학하고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한글이었다. 당연히 나는 한글을 배운 적이 없다. 말하고 들을 수 있으니 그걸로 한글을 안다고 생각했다. 막상 글을 배우니 많이도 어렵고 힘들었다. 그런데 유치원을 다닌 친구들은 곧잘 하는 게 보였고 그 차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당당하던 나의 기세를 꺾어 갔다. 나는 공부를 못하는 아이로 보이기 충분했고 반 친구들에게 그걸 부추기듯 선생님은 나를 무시하며 망신도 곧잘 주었다. 어느 날 받아쓰기 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제출한 받아쓰기 결과가 좋지 않았다. 선생님은 나를 불러 세워 말했다.
''상문이는 집에 한글 아는 사람이 없어? 왜 그렇게 공부를 안 하는 거야.. 모르면 집에서라도 공부해야지..''
나는 철이 좀 빨리 든 편이다. 내가 국민학교를 입학하기 전에 부모님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게 하나 있다. 그건 부모님 학벌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국민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일터로 나가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나는 어린 나이였지만 부모님이 어렵고 힘들게 살았다는 것, 지금 나를 힘들게 키우시고 있다는 것 정도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선생님이 별 뜻 없이 뱉은 말 한마디에 나는 엄청난 수치심을 느꼈다.
혹시나.. 혹시나.. 정말 부모님이 한글을 모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래서 내가 공부를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처한 환경은 그렇게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창피했다. 남에게는 흘려들어도 되는 말이 나에게는 꼭 사실을 말한 것처럼 들려서 말이다.
그 말을 듣고 주변을 살펴보니 반 친구들은 모두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따가운 눈총에 나는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했다. 빨갛게 달아 오른 얼굴을 애써 숨기려 고개를 숙이며 한참을 떨었다.
만약, 그 순간에 누군가 나에게 '괜찮다'는 위로라도 했다면.. 그랬다면 아마도 폭포 같은 울음을 터트렸을지도 모른다. 훗날 30여 년이 지나서도 그날의 그 감정은 내 곁을 절대 떠나는 일이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날 이후 집에서 아버지께 매일 한글과 구구단을 배웠다. 저녁이 되면 아버지는 땀냄새와 술냄새를 풍기면서 축 처진 어깨로 집에 들어오셨다. 아들이 가난한 환경에 공부까지 못한다는 소릴 들으니 많이 속상해하셨다. 고된 일을 하느라 힘들고 지치셨을 텐데 아버지는 귀찮다는 내색 한번 없으셨고 열정적으로 나에게 한글을 알려주셨다. 학교에서 배운 것에 수백 배는 이해하기 쉬웠고 금세 반 친구들을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나를 대하는 선생님 말투는 사뭇 거칠었고 왠지 모르게 반 친구들도 나를 멀리하는 것 같았다. (정말 내가 공부를 못해서 선생님은 날 홀대하는 것일까..) 이상하게 나만 다른 대우를 받으며 학교 생활을 하고 있다는 기분은 매일 커져만 갔다.
그렇게 매일 선생님과 반 친구들의 눈치를 보면서 나는 자연스레 학교가 싫어져 갔다.
활달하고 당당한 내 성격은 낯가리고 소심한 성격으로 변해 갔고 감당하기 힘들 즈음에 알게 되었다.
나를 보는 시선이 왜 따가웠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