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어린시절
국민학교 입학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은 집에서 부모님과 함께 작성해 오라며 종이 한 장을 주었다.
부모님 나이, 직업, 집은 전세인지, 월세인지, 자가인지, 집안 환경을 조사하는 '가정환경조사서'다.
나의 어머니는 특별할 것 없는 가정 주부다. 생활비가 부족해서 화려한 반찬은 못해줬지만 보리밥에 간장을 비벼서라도 끼니는 꼭 채워 주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일용직 노동자다. 새벽에 인근 버스터미널로 가신다. 터미널 근처 인력소에서 기다리다 보면 하루 일당을 받고 일을 할 수가 있다. 운이 좋으면 같은 곳에서 2~3일 일하는 경우도 있다. 선착순으로 일감이 배정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늦게 나가면 그날은 돈을 벌 수가 없다. 아버지는 요행 없이 꾸준하고 성실하게 인력소에 나가셨고 그렇게 우리 네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셨다. 우리가 잠든 사이 조심스레 새벽을 맞이하신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던 건 비가 오는 날 뿐이었다.
저녁에 학교에서 받아온 '가정환경조사서'를 노란 방바닥에 펼치고 아버지와 함께 작성했다. 마치 시험문제라도 풀듯이 나와 아버지는 많은 고민을 했다. 그중에 인상 깊은 것은 아버지 직업이다. 아버지께 물었다.
"아빠, 직업은 뭐라고 적어야 해요?"
"음.. 반 공무원이라고 적자"
"반 공무원!?"
"상문아, 아빠는 매일 동사무소도 가고 시청도 가고 세무서도 가고 그곳에 있는 공무원과 같이 일하기 때문에 공무원이나 다름없어. 다만 공무원들은 한 곳에서만 일하지만 아빠는 여러 곳에서 일하잖아. 그러니깐 '반 공무원'이라고 하는 거야"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는지 대충 알고 있어서 그다지 설득력은 없었다. 자신의 볼품없는 직업을 적어 보내면 아들이 무시당할까 봐 그렇게 적어라고 한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두터웠기 때문에 모든 이유를 알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말해준 대로 '반 공무원'이라고 적어 내려갔다. 그날 또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은 우리 집이 월세였다는 사실이다. 그 뜻도 잘 몰랐지만 결국 이렇게 낡은 집도 우리 집이 아니란 말에 조금은 충격이었다. 정성스럽게 작성한 '가정환경조사서'를 학교에 제출하고 선생님께서는 개인 상담을 진행했다.
'상문아, 아버지가 '반 공무원'이시던데 어떤 일을 하시니?
나는 자랑스럽게 아버지께 들은 대로 말했고 선생님은 아버지 직업 옆을 빨간색 볼펜으로 그으며 무언가 적었다. 그리고는 며칠뒤 "가정 방문"을 위해 집을 찾아왔다.
우리 집 지붕은 슬레이트였고 어른키 무릎정도 높이의 갈색 마루 하나에 나란히 방 2개가 있다. 방 입구에는 낡은 문지방에 한옥문이 달려있고 누런 창호지는 구멍이 한두 개 뚫려 있다. 한쪽방은 이불과 그릇 등, 살림살이를 넣어두는 창고고 사용했고 다른 한쪽 방은 안방으로 사용했다. 안방에는 싸구려 농짝 하나와 바닥에는 티브이 한대, 전축 한대가 방의 전경 전부다. 방의 크기는 아버지와 어머니, 나, 그리고 남동생 이렇게 네 식구가 누우면 딱 맞아 우리는 항상 서로를 보듬고 잠을 잤다. 안방 뒤로는 쪽문이 하나 있는데 재래식 부엌과 연결되어 있다.
신발을 신고 부엌으로 나가면 왼편에 부뚜막이 있고 부뚜막에는 낡은 무쇠솥 하나가 항상 얹어져 있다. 밖으로 나가는 곳에는 문이라고 하기에 초라한 낡은 나무판자 하나가 간신히 바람을 막고 있으며 그 옆으로 곤로 한대와 빨간 대야, 그리고 빨래판과 다듬이 방망이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아침에 씻을 때면 어머니가 곤로에서 물을 끓여 세수대에 찬물 반, 따뜻한 물 반을 섞어 준다. 어머니는 물을 아끼시려고 세수한 물로 머리를 감고 발도 씻고 남은 물로 빨래도 했다. 이렇게 사는 것에 대한 불편함은 없었고 이곳은 항상 포근함과 행복이 깃든 나의 최고의 보금자리였다.
어머니는 선생님이 집에 왔을 때 마땅히 대접할 차가 없어서 따뜻한 설탕물을 정성스레 내주셨다. 꽃이 새겨진 예쁜 사기그릇에 말이다. 선생님은 퀴퀴한 냄새가 났을지도 모르는 우리 집 안방에서 오래 앉아계시지 않았다. 설탕물은 입에 대지도 않은 채 간단한 인사치레 정도만 하고 바로 일어났다. 어머니는 스스로를 낮추시고 수십 차례 굽실대며 잘 부탁한다고 했다. 그런 어머니를 향해 고개 한번 숙이지 않은 선생님은 쫓기듯이 '가정방문'을 마치고 돌아갔다.
이렇게 선생님에게 우리 집 형편이 공개되고 아이러니하게도 가난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일들이 많아졌다.
무상 교육이라던 '국민학교'는 매달 '육성회비'라는 명목으로 수업비를 내야 했다.
'육성회비'는 대략 월 1000원 1년에 12,000원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부모님이 교사, 은행, 공무원 등 잘 사는 집안는 오히려 '육성회비'를 면제해 줬다는 것이다.
라면이 대략 150원~200원 정도인걸 감안하면 한 달 1000원은 낼 수 있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역시나 나에게는, 아니 우리 집 형편에는 부담스러운 금액이다. 그래서 '육성회비'를 못 낸 적이 종종 있었다.
그럴 때면 칠판 앞으로 불려 나가 종아리를 수십대 맞거나 구레나룻을 잡히면서 뺨을 여러 대 맞아야 했다. 맞고 나면 항상 1교시가 끝날 때까지 칠판 구석에서 친구들을 향해 양손을 들고 반성을 해야 했다. 맞은 것보다 친구들 앞에 서있는 것이 창피해서 고개 숙이고 운 적이 많다. 나에 대한 이미지가 그렇게 정착했고 어느 날 내 뒤에 앉은 여자애가 나에게 물었다.
"상문아 궁금한 게 있는데.. 너는 왜 매일 같은 옷을 입고 다녀?"
"왜? 무슨 상관인데, 네가 알아서 뭐 하려고."
괜한 열등감에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속으로 부끄러운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무리 태연한 척해봐도 소용없었다. 뒤에서 계속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고 무언가 속삭이는 것 같아 신경 쓰였다. 그러다가 옆 분단 앞쪽에 앉은 여자 아이들이 뒤돌아 보며 수군거리는 모습을 보고 이윽고 터져 버렸다.
일어나서 앉아 있던 의자를 분단 사이로 던져버리고 입안 한가득 울음을 담고 집으로 도망처 버렸다. 어머니는 무슨 일이냐며 나를 달래 주었고 어머니 품에 안겨 한참을 울었다. 나는 울면서 되려 비수 꽂는 말들로 어머니까지 울려 버렸다.
어머니께서는 내 울음이 그칠 때까지 '엄마가 미안하다, 엄마가 미안하다'만 반복하시며 함께 우셨다. 나의 속상함은 어머니께 모두 토해 냈지만 그걸 다 받으신 어머니는 내가 잠들 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자주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셨다. 그럴 때마다 자는 척을 하며 눈을 뜨지 못했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며칠 전 어머니는 나에게 옷과 신발, 그리고 책가방을 선물해 주었다. 집에서 40분 정도 걸어가면 재래식 시장이 하나 나온다. 재래시장 입구에는 리어카에 물건을 놓고 장사하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그곳에서 나는 기쁜 마음으로 옷도 고르고 신발도 고르고 가방도 골랐다.
그동안은 어디서 가져온 옷인지 모르는 낡고 해진, 조금 크거나 작은 옷들만 입고 다녔다. 늘 새 옷을 입어보고 싶었지만 난 장남이고 형이니깐 부모님을 힘들게 하면 안 됐다. 그래서 옷을 산 그날은 내게 너무도 특별하고 기쁜 날이었다. 입학식 전날 새로 산 옷과 신발을 머리맡에 두고 아버지의 팔베개 속에서 내일을 기다리며 잠들었다. 입학식 이후로 나는 매일 새 옷만 입고 다녔다. 불과 며칠 전 이렇게 행복했는데 학교를 뛰쳐나온 것도 모자라 반친구 말 한마디에 어머니를 원망하고 있으니 나는 참으로 나쁜 아이다.
그날 이후로 어머니에게 새 옷을 사달라고 점점 떼쓰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다음에 사준다는 말만 하고 결국 사주질 않았다. 아니 사줄 수가 없었다. 매일 아침에 어머니가 챙겨주시는 옷을 볼 때면 '색깔이 맘에 안 든다, 작다, 크다, 어제 입었다' 등의 불평이 절로 나왔다. 자연스럽게 부모님을 원망하는 마음도 조금씩 생겨났다. 그런 불평 속에서 내가 가난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고 선생님과 학교 친구들이 왜 나를 홀대하고 업신여겼는지 느낄 수가 있었다.
자신보다 가난한 사람은 무시해도 된다는 무언의 본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힘없이 머리도 나쁘고 어리석어 보였을 테니까,
그걸 감정으로 느꼈던 것이다.
그런 사이 설레던 봄은 달아났고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나쁜 아이로 점점 변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