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쓰레기통
국민학교 입학을 하고 기준이와 동진이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은 등교와 하교를 함께 했다. 우리는 생각보다 사교성이 좋지 못했는지 한동안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하지만 서로가 있어서 학교 친구들이 없음에도 전혀 외롭지도, 심심하지도 않았다. 우리 셋은 항상 즐거웠다. 특히 기준이 집에서 놀 때는 좀 더 즐거웠다. 기준이 부모님은 두 분 다 늦게 까지 일해서 집이 자주 비었다. 집은 좁고 길었으며 잡다한 물건들이 많아 전파사를 연상케 한다. 안방 구석에는 녹색 전선들이 허리 높이만큼 쌓여있고, 부엌 입구에는 드릴과 망치, 드라이버와 같은 작업공구들이 수북이 진열되어 있다. 또 한쪽에는 버리진 라디오, 티브이, 전축 같은 전자제품도 더미로 무너질 듯 쌓여있다. 기준이 집은 우리 집보다 전체적으로 크지만 내부는 왠지 더 좁은 듯했다.
기준이의 아버지는 경비원이다. 옆 도시 대기업 화학회사 입구에서 근무하신다. 키가 작고 왜소한 체격에 얼굴을 보면 족제비가 생각난다. 낮과 밤을 번갈아 가면서 출근하고 집에 오시면 하루 종일 잠만 잔다. 그래서 그런지 기준이 집은 낮에도 햇빛이 들지 않고 많이 어두웠다. 기준이 어머니는 우리 동네에서 30분 정도 걸어가면 나오는 시내 입구 식당에서 일한다. 기준이와 비슷한 포근한 인상에 어깨밑으로 내려오는 머리를 묶고 검은 비닐봉지를 흔드시며 뒤뚱뒤뚱 걸으신다. 식당은 저녁 늦게 끝나서 평소에는 어머니를 잘 만나지 못한다.
기준이는 만화책을 상당히 좋아했다. 집에는 항상 '소년 챔프', '아이큐 점프'라는 만화 잡지가 널브러져 있었다. 부엌에 가면 소시지가 있었고 라면도 많았다. 놀다가 배고프면 라면을 부셔먹거나 소시지를 자주 먹었다. 나와 동진이는 주로 만화책을 보러 기준이 집에 자주 갔다. 좁은 방에 누어서 서로의 배에 한쪽 발을 올리고 만화책을 본다. 그러다가 질리면 드릴도 만져보고, 고장 난 전축도 막 틀어보고, 아무 곳에나 장난전화도 해보고, 고철더미를 뒤져보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기준이 집은 참 신기하고 재미난것 투성이다.
그렇게 한참을 놀다가 기준이 아버지가 집에 오시면 족제비 같은 눈으로 우리를 혼냈다. 항상 집안을 난장판을 만들어 놨으니 그럴 만도 하다. 자주 혼내는 방식이 있다. 가운데 손가락을 밤쯤 접은 솟음 주먹을 쥐고서 이마를 오른쪽 위에서 왼쪽으로 살짝 비껴 치는 방법으로 꿀밤을 한 대씩 때린다. 그럴 때마다 혹이 나고 며칠 동안 이마가 쓰리다. 우리가 동네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분이다. 기준이 집에서 놀다가 아버지가 오시면 맞기 싫어서 창문으로 뛰어내려 도망가기 바빴다.
기준이는 통통한 체격에 성격까지 온순해서 포근한 이미지다. 만나면 기분이 좋다. 뭐든지 다 호응해 주고 잘 따라주는 친구다. 만난 건 동진이와 먼저 만났지만 내심 기준이를 먼저 만나고 싶고 그랬다. 내가 하고 싶은걸 다 함께 해주는 친구라서 그랬을 테다.
화창한 여름날, 귓가에는 매미 소리가 떠나질 않는다. 동네에서 만나면 우리는 가만히 있는 적이 없다. 어김없이 무얼 하며 놀까 고민하던 중, 참새를 잡자는 동진이의 말에 우선 새총부터 만들기로 했다. 고무줄과 나무가 필요했다. 새총모양의 나무를 구하려고 동네 뒷산으로 올라갔다. 나와 동진이가 앞장서고 기준이가 뒤에 따라왔다. 성격 탓인건지 행동이 굼뜬 건지, 기준이는 어딜가나 조금씩 느렸다. 나는 그런 기준이에게 자주 재촉하는 편이다.
'야 빨리 좀 와 이 느림보 녀석아. 왜 이렇게 느려 먼저 가버릴까 보다'
'어... 미안.. 빨리 갈게, 같이 좀 가자 힘들어'
편한 말투로 말하면서 무의식적으로 놀렸다. 그런데도 기준이는 화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순응하며 사과를 한다. 산 정상 근처 약수터까지 올라가도 마땅한 나무를 찾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돌아서 내려오는데 바닥에 그럴싸한 나뭇가지를 발견했다. 나와 동진이가 잽싸게 달려가서 동시에 잡았다. 서로 자기 거라며 우기다가 결국 '가위바위보'를 했다. 동진이가 차지했다. 이 녀석은 매번 운이 좋은 편이다. 나와 기준이는 아쉬운 대로 내려오는 길에 썩은 나뭇가지 몇 개를 주어서 내려왔다.
이제는 고무줄을 구해야 했다. 동네 밑으로 쭈욱 내려가면 쓰레기장이 하나 있다. 거기에서 찾아보기로 했다. 한쪽에는 음식물을 담은 검정 비닐봉지가 터져서 김칫국 같은 것들이 흘러 나와있었고, 다른 쪽에는 꽃이 그려진 두꺼운 겨울이불과 다리가 부러진 책상이 널브러져 있다. 그 중간쯤에 겨울 점퍼와 옷들이 쌓여 있고 그 옆에는 어른 키 만한 깨진 거울들도 보인다.
쓰레기장은 아버지 발냄새와 동네 밭에 주는 거름 냄새가 섞여 난다. 개의치 않고 우리는 쓰레기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보물 찾기를 하듯이 뒤져봤지만 쓸만한 것이 없었다. 동진이는 음식물이 담긴 검은 봉투까지 찢어보는 열정을 보였다. 그 와중에 기준이가 뭔가를 발견했는지 나와 동진이를 불렀다. 할머니들이 자주 입는 파자마 뭉치다. 파자마 허리 밴드 부위가 찢어져 그사이로 고무줄이 나와있었다. 우리는 셋이 모여 서로의 목 뒷덜미를 붙잡고 기합을 넣으며 보물이라도 찾은 듯 기뻐했다. 함성을 지르고 어깨동무를 하며 기준이 집 근처 골목길에 앉아 새총을 만들기 시작했다. 카터 칼과 얇은 돌로 나무를 한참 깎았다. 겨우 껍질을 벗기고 고무줄을 빼내기 위해 파자마를 다 찢었다. 파자마를 서로 잡고 당기며 이리 찢고 저리 찢고 그것 또한 신이 났다. 그렇게 발굴한 고무줄은 아쉽게도 세 명이 쓰기에 조금 짧았다. 나는 습관처럼 동진이와 먼저 고무줄에 대한 합의를 했다.
'동진아, 고무줄이 조금 부족하니깐, 내 거랑 너꺼랑 먼저 만들고 기준이꺼는 이따가 구하러 가보자'
고무줄은 기준이가 마련했지만 이기적인 결정이었다. 평소에 기준이는 모든 것을 이해해 주니깐 우리는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기준이는 흔쾌히 '그래 그러자' 대답하며 우리 마음대로 하는 그 분위기를 맞춰주었다. 어둠 컴컴해질 무렵 나와 동진이는 새총을 다 만들었다. 그러고는 기준이의 고무줄을 주으려 다시 쓰레기장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기준이는 괜찮다며 집에 가자고 했다. 보통은 따라서 갔을 텐데 그날은 힘이 없고 조금 이상했다. 기준이가 말했다.
'배도 고프고 이제 집에 들어가자~ 아빠도 곧 올 것 같아. 새총은 다음에 다시 만들자'
나와 동진이는 새총을 하나씩 만들었지만 기준이의 나뭇가지는 길바닥에 버려진 채 우리는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나는 기준이가 너무 좋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기준이는 항상 함께 해주고 불평도 없다. 욕심도 없어서 모두 내게 양보하고, 자기보다 나를 우선으로 챙겨준다.
그런데 기준이는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산에서 처음 나를 만났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나와 친구가 되어서 기뻤을까, 나와 놀 때면 즐거웠을까, 또 만나고 싶을까, 정말 좋아서 내게 양보하는 걸까, 그런 기준이 맘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귓속에 맴돌던 매미소리가 나지 않을 무렵에 그 일이 생겼다.
그 일 이후 나와 기준이는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감정에 서로를 증오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