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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국 Jul 01. 2024

홍천에서 한달살기

; 드디어 실행한 기분 좋은 시골생활

                         홍천에서 한 달 살기

                                                                             경희대학교 명예교수 김상국      

나는 깡촌 출신이다. 옆에 마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이십여 호 정도 되는 조그만 마을이었다. 그런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유학도 가고, 대학교 교수도 되었으니 그런 의미에서는 나도 제법 출세한 것 같다.     


대부분의 시골 출신이 그렇듯이 대처에서 오랜 생활을 하여도 마음 한구석에는 시골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끊임없다. 그러나 마음은 굴뚝 같을지라도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는 것은 이런저런 이유에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내 로망을 대신 해주는 수단으로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TV 프로그램을 즐겨 보는 편이다. 그런데 이런 로망이 나만의 것은 아닌가 보다.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 보면 어떤 때는 서너 개 방송에서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KBS야 정부 보조금과 우리가 내는 시청료 수입이 있지만, 전적으로 광고 수입에 의존해야만 하는 민간방송은 시청률이 낮은 프로는 방송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골 생활에 대한 로망’은 여러 이유로 지친 우리 남정네들의 일반적인 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런데 드디어 나에게도 시골 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자식들의 전적인 호응을 얻은 마누라님의 소원으로 아파트 집을 고치게 된 것이다. 30년 가까이 살았지만, 고친 것이 하나도 없다. 벽지 한번 안 바꾸었으니 대단하다면 대단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 긴 기간을 참아 준 아내가 어떤 면에서는 고맙기도 하다. 그러나 별로 훌륭하지 못한 남편을 만났으니 ‘참아 준 것이 아니라, 참아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관찰하기에 그 집이 수리(요샛말로 고치면 리모델링)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를 판단하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그 집 현관문에 달린 도어락을 보는 것이다. 집을 리모델링하면 당연히 바꾸는 것이지만, 최소한 집에 이사 오면, 또는 계속 살더라도 성능 좋은 도어락으로 바꾸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도 건물 당시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참 시골 놈, 촌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러나 하여튼 우리 집도 고치게 되었다.     


1. 내 위치가 이 정도였나?     


그러나 집을 고치게 되면서 예상치 못한 당황스러운 현상이 발생하였다. 집을 고치자는 안사람과 자식들의 정중한(?) 제안에 나도 조금은 미안한 생각도 들어 “그렇게 합시다.”라고 동의하였다. 그런데 자식들 말이 “리모델링하는데 아빠는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뾰족한 아이디어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별생각 없이 “그래라.”고 응답하였다. 그러나 거기서부터 사단이 났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은 안 버리고, 집안의 벽지는 어떻게 하고, 거실의 장식은 어떻게 하고 등에 나의 의견은 깡그리, 정말로 거의 깡그리 무시되는 것이다.     

하도 억울(?)하여 “이놈들아, 너희들 아빠의 흔적을 없애려는 거야?”라고 소리를 질러 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 같았다. “아빠가 관여하지 않기로 약속했잖아요. 그리고 40년 동안 독재하였으면 이제 엄마에게 양보해도 되잖아요.”라는 것이다. 아니 내가 독재라니…. 참 할 말이 없다. 내가 즈네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얼마나 노력하여 키웠는데…. 앞서 말한 대로 깡촌 출신의 촌놈이 부모의 별 도움도 없이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오기까지 얼마나 노력하였는데….     


순간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이놈들이 이제 감히! 저희들이 컸다고. 이런….’ 불쑥 이런 맘이 들었다. 하지만 또 한 번 생각하니 자식들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몇 년 전 아버님 제사 때다. 제사가 끝나고 난 다음에 식사하는 자리였다. 우리 집은 3남 1녀다. 즉 며느리가 셋이라는 뜻이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여동생까지 참여하였었다.      


다른 때 같으면 제사 지내고, 밥 먹고 자는 것이 일반적인데, 부모님께서 모두 돌아가셨고, 또 우리 집으로 시집 온지도 3, 40년이 되어서인지 자유롭게 남편들을 성토하는 것이었다. “너무 자기 고집만 새운다. 너무 양보할 줄 모른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만 한다.” 등등 ‘아니 세상이 아무리 변했어도, 이런….’ 그런데 여동생이 끼어들어 우리 형제 편이 아니라, 여자들 편을 드는 것이다.      


“오빠들이 정말 그래. 오빠들도 자기가 그러는 줄 알아야 해. 그리고 막내, 너도 마찬가지야.” 그러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정말 큰 반전이었다. ‘아니 동생인 너까지? 아니 네가 부루터스냐?’ 참 나. 우리 삼 형제는 모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최소한 우리 집안 출신인 여동생까지 저럴 줄이야. 그러고 보니 어머니께서 살아계실 때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대해 그런 말씀을 자주 하셨던 기억이 났다. 그 고집 머리와 가부장적 태도 때문에 할머니와 시집온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하셨는지 말이다.     


어떻든 여동생이 편을 드는 바람에 그날은 완전히 며느리들의 남편 성토장이 되고 말았다. 그저 우리들은 ‘허허’ 하며 『너그러운 척』하는 웃음을 짓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똑같은 일이 이제 우리 집에서 그것도 자식들 입에서 나온 것이다. 참 할 말이 없다. 그러면서 자식들 말이 더 걸작이다. ‘아빠가 옆에 있으면 분명히 간섭할테니, 아빠가 그렇게 원하는 시골 한달살기’를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시골 한달살기’가 시작되었다.     


2. 홍천 한달살기를 정하기까지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하나?’ 처음에는 구례, 하동 쪽을 생각하였다. 옛날부터 내가 은퇴하여 시골 산다면 그쪽에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우선 산세가 그렇게 유려(流麗)할 수가 없다. 구례 쪽 계곡은 넓을 뿐 아니라, 주위 산세가 물 흐르는 것처럼 시원하면서도 귀한 품격(品格)이 있다. “아, 화엄사가 괜히 여기에 터를 잡은 것이 아니구나!” 여러 번 방문하면서도 매번 동일하게 느끼는 감정이다.    

  

다음은 구례의 ‘물’ 때문이다. 신체가 약알칼리성을 가질 때 우리 몸이 건강하다는 것은 우리가 모두 알고 있다. 구례는 우리나라에서 몇 군데 안 되는 알칼리성 약수가 나오는 곳이다. 특히 사성암 근처 약수는 좋기로 매우 유명하다. 구례군에서도 제주 삼다수처럼 약수 판매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첫 번째 선택은 구례 쪽이었다. 그러나 단점이 하나 있다. 너무 멀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6주간을 살아야 하는데, 서울에 약속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구례에서 오고 가기에는 너무 멀다.

 OK! 구례는 다음에 내가 좀 더 시간이 있을 때 살기로 하자. 이번은 아니다.

      

그러면 다음에는? 

문득 떠오르는 것은 강원도였다. 강원도는 나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곳은 아니다. 그러나 왠지 마음에 끌리는 곳이다. 언젠가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마 전생(前生)에 내가 강원도에 산 것 같다.” 강원도에 오면 왠지 마음이 푸근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천에 오게 되었다.     


3. 홍천 살기 첫 2주 동안 느낀 것들


부지런 떨면서 가방 하나에 옷 몇 가지를 챙기고 홍천을 향했다. 너무 기분이 좋다, “아, 드디어 내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을…. 하하” 두 시간의 운전도 가볍게 끝내고 펜션에 도착했다. 

신난다. 

여름옷이라는 것이 별로 부피도 차지하지 않고, 촌놈은 원래 많은 것이 필요하지도 않아, 십분도 안되어 여장(?)을 풀고, 넓은 창가에 앉았다. 그래! 내가 이런 경치를 보기 위해 여기에 왔지. 시원하다. 숲도 푸르다. 자동차로 오를 때 살짝 봤던 저 밑의 냇가는 보이지도 않고,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내 마음속에는 바로 옆에 있는 것과 진배없다.      


              

이렇게 좋은 것을….’ 첫날의 감정이다.

 ‘나는 자연인이다.’ 프로에서 나오는 생활을 드디어 나도 하게 되었다. 그것도 『힘든 농사도 짓지 않고, 재미만 보는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홍천 첫 2주 동안의 감정을 적어 보겠다.    

 

(1) 우선 참 조용하다.     


여기서 ‘조용하다.’는 표현은 사실 도시에서의 조용함과는 매우 다른 조용함이다. 내가 있는 펜션 계곡의 폭은 아마 6~700 미터 정도 될 것이다. 넓은 계곡은 아니지만 그리 좁은 계곡도 아니다. 그러나 시골의 고요함은 계곡 건너편 아이들의 노는 소리가 거의 그대로 들리는 조용함이다.      


도시에서는 아무리 조용해도 몇십 미터만 떨어지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몇백 미터 떨어져도 들린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도시에는 잡음이 많다. 자동차 소리, 공사장 소리, 옆집에서 나는 소리 등등. 다만 그 소리가 밤이 되면 적어서 들리지 않을 뿐이지 소리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도시는 들리지 않으나 들리는 잡음 소리가 매우 많다. 그리고 이 때문에 소리가 멀리 전달되지 않고 죽어버리는 것이다. 시골에서 살아보면 나의 이 표현이 무슨 뜻인지 바로 느낄 수 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또 한 번 느낀다. 내가 사는 패션 주차장은 위편에 있다. 그런데 주차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 주인아주머니 말대로 누가 오는가 보다. 내 평화가 깨지면 안 되는데.’ 라는 조금은 이기적인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려 보았다. 아무도 없다. 우리 주차장이 아니라 밑에, 밑엣 집 주차장에서 주차하는 소리였다. 이것이 시골의 조용함이다.     


(2) 다음은 역시 맑고 맑은 공기다.  

   

시골에서 사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 중 하나는 “시골은 공기가 맑고 아침에 일어나면 정말 기분이 상쾌합니다.”라는 말이다. 너무 자주 들어 그저 식상한 말로 치부하였다. 공기가 맑으면 당연히 기분 좋고, 상쾌한 것 아닌가? 나의 생각이었다. 처음 며칠에는 별로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니 왠지 기분이 좋다. “왜 이리 기분이 좋지? 아, 그래 이거구나.” 당연한 그분들 말씀이 이제사 현실로 느껴졌다.      

우리는 좋은 것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드리며, 고맙게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 같다. 지금 맑은 공기에 감사하는 나도 한 달 후쯤에는 그렇게 되지 않을까?     




(3) 잊어버렸던 소리를 다시 찾은 기쁨     


- 시골에 살면 닭 울음소리는 가장 흔한 소리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들은 적이 얼마만인가? 그래 십여 년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오래전인 것 같다. 그런데 그 소리가 들린다. 하하! 정말로 들린다. 재미있다. 그래 저 소리야. 저게 닭 소리였지. 반갑다. 흐흐 반갑다. 그런데 이 청승맞은 닭이 새벽에만 우는 것이 아니다. 마냥 운다. 하루 종일 운다. 이것들이 때도 모르나? 뭐 그래도 괜찮다. 나를 위해 우는 것은 아니고 본능으로 우는 것이니까. 용서하자. 저도 본능인데.      

그런데 괜히 심술이 조금 난다. 먹물든 사람들의 괜한 필요 없는 시비를 하나 더했다. ‘저 녀석 분명히 GMO에 의해 잘못 개량된 닭일거야.’      


-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개짓는 소리다.


나는 개를 좋아한다. 그러나 아파트에서 시도 때도 없이 짓는 개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끊임없이’ 짓는 개를 자기만 좋다고 키우는 무책임한 사람들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골 개는 매우 다르다. 우선 이놈들은 동네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대충 다 안다. 주인만큼 자주 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별로 짖을 일이 없다. 그래서 시골 개는 『할 일이 없어』 짓는다. 


울음소리를 들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도시 개는 ‘웡웡’하며 날카롭게 공격적으로 짓는다. 하지만 시골 개는 “워어~~~응, 워어~~~응‘하며 길게 빼어 짓는다. 마치 의미 없이 우는 늑대 소리와 어느 면에서는 비슷하다.      

그리고 몇 번 울고는 금방 그친다. 왜냐하면 자기 울음소리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자기도 알기 때문이다. 그냥 너무 심심해서, 자기도 개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의미 없이 짖어 본다는 것을 스스로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그다음 행동도 뻔하다. 그냥 길게 들어 배를 옆으로 누워 잠을 자거나, 아니면 두 발을 앞에 모으고 그 위에 턱을 받치고 물끄러미 앞을 바라본다. 쉽게 말하면 멍때리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통 안에 들어앉아 시름없이 옷을 꿰매는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 같다. 그런 놈이 바로 옆집에 있다.      


그래 너도 참 오랜만이다.  

   

- 새소리, 뻐꾸기 소리도 지천이다. 


새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 어느 새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항상 재잘거린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잡음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다른 소리가, 아이들 노는 소리나 닭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가 멀리 전달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뻐꾸기 소리는 조금 이상하다. 낮에도 울지만, 밤에도 끊임없이 운다. 어찌 저리 슬프게 하루 종일 밤에까지 울까? 그래서 목에서 피를 토하며 운다는 말이 사실인가? 그 피가 진달래꽃의 빨간 색이 정말 되었을까?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한(恨)이 밤이 되어서도 계속 울어야 할 만큼 진했기 때문일까?      


귀촉도, 두견새, 소쩍새, 자귀(자규), 접동새, 불여귀 등등 같은 새는 아니지만 비슷한 새에 대한 이름이 참 많기도 하다.     


문득 이 글을 쓰다 보니 옛날 생각이 난다. 이조년(李兆年)의 시조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 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하여 잠못이뤄 하노라.     


아마 고등학교 때 시험 보기 위해 외웠던 시조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이 시조는 마음에 와닿는다.


 “... 일지 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하여 잠못이뤄 하노라.” 


이런 애절(哀絶)하면서도 다정(多情)한 시조는 다시 찾기 어려울 것 같다. 


아!     


다음에는 또 무엇을 느낄까?

나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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