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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엉 Dec 09. 2023

거장의 조금 불친절했던 질문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리뷰 (스포주의)

 지브리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최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관람했다.

특히 이번 작은 유난히 호불호가 강한 것 같은데, 우선 내가 해석한 영화의 내용을 열거해보고 어느 부분이 불친절하게 느껴졌는지 이야기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오로지 영화를 본 사람의 관점에서 쓴 글이니 다량의 스포가 들어갈 예정.


내 시선에서 본 영화

- 탑에 들어가기 전 마히토

아버지는 차에 태워 마히토를 등교시킨다. 과시의 목적이지만 오히려 이는 마히토의 학교적응을 어렵게 만들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를 아는 사람이라면 마히토가 감독 본인을 투영한 인물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어린 시절을 반영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모두들 고통받았지만 정작 아버지는 그로 인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이를 과시하며, 자신은 그 부의 수혜자다. 주변과 자신의 괴리감은 마히토에게 혼란을 주는데, 이로 인해 마히토는 주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다. 

 이에 더해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재혼은 마히토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마히토에게 현실은 벗어나고 싶은 고통스러운 곳이 된다. 마히토는 이 분노를 어디에 표출해야 할지 모른다. 


- 마히토와 왜가리 

겉치레로 병문안을 가던 마히토와 부리구멍을 메꾼 뒤 당장 떠날 것처럼 이야기하던 왜가리. 살기 위해 거짓을 외치는 둘의 모습은 참 닮았다.

 마히토에게 탑 속의 세계를 안내하는 왜가리는 마히토의 모습을 투영한 것처럼 보인다. 마히토는 사고로 엄마를 잃은 후, 무표정과 거짓으로 자신을 숨기고 보호한다. 왜가리는 "모든 왜가리는 거짓말쟁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교활한 건 살아가기 위한 지혜다."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현실에 있던 마히토의 모습과 유사하다. 자신을 상처 내고, 병문안을 가 담배를 훔치는 등 비뚤어진 마히토의 행동은 현시점을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거짓되며 교활한 모습, 펠리컨을 묻어주거나 왜가리를 도와주는 행동은 본래의 진실된 모습으로 볼 수 있다.  




- 할아버지가 창조한 세계

 편의상 할아버지는 탑 속의 세상을 창조한 사람으로 나온다. 그는 자신의 세상은 생명체와 같다고 말한다. 곰팡이도 피고 벌레도 들끓는다며 자신이 만든 세상이지만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다고 한다. 아마도 탑을 관리하는 목적으로 데려왔으나 영역을 넓히고 창조자의 통제를 벗어나려는 사랑앵무, 와라와라를 먹을 수밖에 없던 펠리컨. 이런 불안요소들이 바로 곰팡이이며 벌레이다. 이런 곰팡이는 여기도 현실과 다를 바가 없음을, 또한 수용하거나 극복하며 살아야 함을 깨닫게 해주는 요소들이 아닐까 싶다.


 마히토를 후계자로 삼으려던 할아버지는 '마히토는 착한 아이야'라며 돌려보내려 한다. 여기는 지옥이라던 펠리컨의 말처럼, 완전한 세상을 꿈꾸던 창조자 자신도 누군가에겐 악이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세상은 시선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완벽한 세상은 없음을 알려주는 곳이 탑이었다. 탑은 마히토에겐 성장의 발판이었고, 펠리컨에겐 지옥이었으며, 앵무새들에게는 족쇄였다.

 

개인적으로 앵무새의 캐릭터 디자인이 너무 잘됐다고 생각하는데, 이름도 이쁜 사랑앵무를 어쩜 저렇게 탐욕스럽게 디자인했는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이녀석들 때문에 불호가 생겼을지도.


- 탑 속에서의 여정 = 잃어버렸던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

 여느 주인공의 서사가 그렇듯, 모험은 주인공을 성장시키는 밑거름이다. 탑 속에서 펼쳐지는 모험은 마음의 문을 굳게 닫고 있던 마히토가 진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 현실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처음 탑의 세계는 마히토에게 현실을 잊게 해주는 일종의 탈출구였다. 새엄마를 찾기 전까지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건 이곳에 남아있기 위한 일종의 핑곗거리로 들린다. 

 와라와라에게 줄 물고기를 손질하고, 와라와라가 불탄다며 키미에게 소리치고, 펠리컨을 묻어주면서 본래의 순수한 모습으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키미가 해주는 토스트를 먹을 때 마히토는 그제야 활짝 웃는다.

가면을 쓸 필요 없는 탑 세계에서 자유를 느끼며 본래의 선한 모습으로 돌아왔고 자연스레 새엄마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키미와 왜가리의 도움으로 역경을 헤쳐나간 마히토는 탑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을 얻었다.


-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마히토는 후계자가 되겠냐는 할아버지의 부탁을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그리고 현실에서 친구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영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물어보는 듯하다. "마히토는 이런 방법으로 현실을 헤쳐나가기로 결심했어. 너는 어떻게 살아갈래?" 미래에 대해 이런저런 고민이 많던 찰나에 거장의 질문은 많은 생각을 들게 했다.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이번 작품

 우선 나에게는 결국 '호'로 다가온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 관람이 끝나고 영화에 대해 곱씹어볼 수 있는 여운을 주는 영화를 좋아하는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래에 고민이 많던 참인 나에게 제목대로의 질문을 던져주고 영화 속 여러 의미들을 고민하게 했다. 


 하지만 동시에 들었던 생각은 '왜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지 알 것 같다.'였다. 지금까지의 지브리 영화에 비해 내용이 더욱 난해하고 복잡한 영화였다. 물론 관람 후, 영화에 대해 깊게 파헤치는 즐거움이 있지만 이는 영화 자체에 대한 즐거움을 전제로 한다.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는지, 너무 많은 숙제를 내주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


영화가 불친절한 이유

- 몰입이 어려운 서사

판타지는 사실 어렵다. 세계관 구축은 물론이며 그 세계로 대중을 끌어들일 만큼의 몰입이 있어야 한다.

몰입을 도와주는 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OST같은 음악이 될 수도 있고, 손에 땀을 쥐는 전개일 수도 있다. 또는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되면서 몰입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 영화는 어땠을까?

당신은 왜 젊어지셨는가

 우리가 어려운 영화를 보고 나서 열심히 해석을 찾고 토론하는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처음부터 수많은 물음표가 쌓이는 영화다. 궁금증이 미처 해결되기 전에 또 다른 물음표가 다가온다. '왜가리는 왜 엄마 형상을 만들어서 마히토를 현혹시켰지?', '저 무덤은 누구껀데?' 등의 수많은 궁금증이 생기지만 해결하지 못한다. 물론 모든 것을 해석할 필요가 없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런 궁금증이 너무 쌓이게 되면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게 되고 몰입에 방해가 될 수 있다. 이 영화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포용의 자세를 갖지 못하면 제대로 즐길 수 없는 영화다. 그렇다면 몰입을 도와주는 다른 요소들은?


- T를 넘어서 감정이 없어 보이던 주인공

눈앞에서 왜가리가 말을 걸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할까? 왜가리가 말도 안 되는 자세로 탑에 들어가는데 마히토는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다.

 우선 우리는 영화의 배경이 현실을 기반으로 한다는 걸 인지해야 한다. 마히토의 눈앞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하지만 마히토는 이를 너무나 덤덤하게, 이미 알고 있다는 것처럼 받아들인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사건과 어머니의 부재라는 너무 큰 아픔으로 인해 감정이 메말라버린 마히토의 상황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만, 인생 2회 차처럼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너무나도 태연하게 받아들여 위화감이 들었다. 주인공 정도의 큰일을 우리는 경험해 본 적이 없기에 감정이입이 더 어려울 수도 있겠다.


- 기억에 남지 않는 음악

 

히사이시 조

 지브리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음악이다. '인생의 회전목마'나 '언제나 몇 번이라도' 등 희대의 명 OST들은 우리를 저 판타지 속으로 빠뜨리는 중요한 몰입장치였는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는 그런 음악이 도드라지지 않았다. 히사이시 조가 음악 감독을 맡았지만 내용을 따라가기 급급했기 때문일까? 음악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슬픈 가사에 그렇지 못한 경쾌한 멜로디의 노래가 있듯이, 음악과 장면의 반전효과로 서사를 극대화하는 장면들이 종종 있었는데 그걸 우리가 소화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떡밥과 벅찬 전개의 숙제들이 있었다. 숙제가 너무 많다.


 특히 이번에는 요네즈 켄시라는 너무나도 핫한 J-pop아티스트가 참여해 기대를 모았는데 정작 그 OST는 엔딩크레딧에서야 처음 등장한다. 아쉬웠다.


마무리

 지금까지의 지브리와는 확실히 느낌이 다른 영화였다. 몽환적이고 따스한 감성만을 느끼기에는 어두운 부분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뛰어난 작화는 여전했고, 탑 속의 세상도 매력적이었다. 다만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는 힘들었다.

 마술을 제대로 즐기는 것은 트릭을 파헤치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것이라 한다. 아마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마술과 같은 관점에서 바라봐야 제대로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에게는 호로 다가온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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