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벌레가 되기는 싫다. 그런데 벌레만도 못한 존재가 되기는 더 싫다.

by krush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은 물질주의로 인간의 가치가 '돈과 효용' 그 자체가 된 현실에 대해, 벌레가 된 '그레고르'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당장 멈추라고 소리친다.


자고 일어나니 내 몸은 벌레가 되어 있었다.

그레고르의 인생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레고르의 아버지는 사업에서 파산하고, 그의 어머니는 천식을 앓았으며, 그의 여동생 '그레테'는 어려서 일을 할 수 없는 상태. 그는 어쩔 수 없이 아무리 하루 일이 고되더라도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몇 년간을 고생하며 외무사원으로 일한다. 처음 몇 번은 그레고르의 희생에 대해 모두가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졌으나, 어느 순간부터는 그가 고생하는 것에 대해서는 다들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그레고르는 그런 현실에 안타까워했으나 그는 묵묵히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저 그는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고, 동생 그레테가 가고 싶어 하는 음악학교에 그녀를 꼭 보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잠에서 깨고 보니 그레고르의 몸은 벌레가 되어 있었다. 출근은커녕 그는 바뀐 자신의 몸을 가누지도 못했고, 그 와중에도 그의 생각에는 출근해야 한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의 무단결근에 화가 난 회사의 지배인은 그의 집에 찾아와 그에게 "지금 자네는 이제껏 들어 보지도 못한 방법으로 직업상의 의무를 게을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 이제 보니 자네는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인 것 같군. 지난 몇 주 동안의 자네 근무 성적은 그리 만족할 만한 것이라고 할 수 없네"라고 그레고르를 몰아세우지만, 그레고르가 하는 말을 지배인과 가족들은 알아들을 수 없었고, 결국 그레고르가 벌레가 된 몸뚱이를 일으켜 문을 열자 지배인과 가족은 모두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슬픔에 빠지게 된다.


그레고르가 벌레가 되고 난 이후, 그는 동생이 주는 음식들을 받아먹으며 하루하루 살아가게 된다. 가족 중에 일을 하던 사람이 그레고르뿐이었기 때문에 가족들은 어떻게든 현재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직업을 찾을 수밖에 없었고, 아버지는 경비원 일과 음식 배달일을, 어머니는 뜨개질을 하고, 동생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가끔 그레고르가 방문 밖을 볼 수 있었는데, 그는 아버지가 멀끔하게 제복을 차려입고 뚱뚱했던 몸매가 나아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그가 고생하는 동안 집에서 누워만 있었던 아버지가 그렇게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고 안도감보다는 "자신이 힘들어할 때 도와줄 수 있지 않았는가?" 하는 조금의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그레고르를 챙겨주던 그레테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르바이트일 때문에 힘들어하기도 했고, 점점 그레고르를 챙겨주는 것이 부담이 되었는지 그동안 잘해왔던 음식도 아무것이나 집어넣고 그가 음식을 하나도 손대지 않았음을 확인했음에도 그저 남은 음식을 빗자루로 쓸어 담았다. 그의 방 청소 역시 대충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그를 아낀다고는 했지만, 그를 볼 때마다 기절하곤 했고, 그 모습을 보고 화가 난 아버지는 그레고르에게 사과를 던지며 폭력을 휘두른다.


어느 날 집에 세 들어온 하숙인들이 그레고르가 동생이 켜는 바이올린을 듣기 위해 나왔을 때 그를 발견하게 되고, 그들은 그레고르를 빌미로 "하숙 비용도 내지 않을 것이고 고발할 것"이라고 아버지를 추궁한다. 결국 가족들은 참지 못해 폭발하게 되고, 그레테는 "어머니, 아버지! 이젠 더 이상 못 견디겠어요. 저런 괴물을 계속해서 오빠라고 부르지 못하겠다고요. 저런 괴물은 빨리 없애버려야 해요. 저런 것과 함께 먹고살기 위해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잖아요. 이젠 저걸 없앤다 해도 아무도 우리를 비난하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저게 오빠라면 자신이 벌레가 되었을 때 우리를 위해 나갔을 거예요"라고 외친다. 그레고르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레테는 오빠가 있는 방문을 잠근다. 그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그는 다음날 죽게 되고, 가족들은 조용히 하느님께 감사를 올린다.


벌레, 늙은 가장, 병자, 히키코모리

소설을 읽으며 불쾌감과 슬픔을 가장 많이 느꼈을 사람들은, 아마 그 벌레가 다른 누군가로 치환되어 보였을 사람들이다. 필자는 소설 속의 벌레가 정말 다양한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늙은 가장'은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고 온 가족이 살 수 있도록 많은 돈을 벌어왔지만 가족들은 어느 순간부터 그의 고생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고, 나아가 그가 늙어 이제 일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그를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고 불편해한다. 그를 모시고 사는 삶을 몇 달 정도는 할 수 있었으나, 이렇게 평생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떠올리면 암울하게만 느껴지고, 나아가 그를 자신과 가족들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든 장본인으로 여기게 된다.


'병'에 걸린 사람('병자'), 그의 주위에 가면 괜히 병이 옮을까 두렵고, 가족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를 간병하며 살아왔지만 이로 인해 가족구성원들이 점점 힘들어하자, 어느 순간 병든 그가 너무나도 밉게 느껴지고, 그가 죽으면 편안해지지 않을까 하는 야속한 생각마저 든다.


사회에서 크게 데고 돌아온 '히키코모리'. 역시 가족이라는 이유로 방안에만 틀어박혀있는 그를 챙기고 보살피기 위해 힘을 써보지만, 나아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어느 순간 우리 가족구성원의 '짐'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집에 틀어박히기 전 그가 가족들을 위해 했던 희생들은 어느 순간부터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생각되며, 그가 들으라고 욕을 하기까지 한다.


이들뿐 아니라, 가족이자 감사했던 존재이나, 현재는 돈을 못 벌며 도움이 필요한 존재가 되어버린 모두가 이 책의 주인공이 되지 않을 이유는 없다.


필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가족들을 비난하기 어렵다고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런데 실제 소설 내용 중간중간을 살펴보면, 가족들은 충분히 자신들도 일할 수 있었으나 그레고르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고 태만하게 살아왔다. 또한, 그레고르에게 의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을 들을 수 있는지 여부를 살피지 않고 더럽고 불쾌하게만 여겼으며,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다면 충분히 생활을 영위하고도 남을 삶을 살 수 있었으나, 주변 사람들에 대한 눈치 때문에 그러지 않았다. 그에게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고 그를 보살폈다면 더 나아지지는 못할지라도, 다 함께 살아갈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이후 5년이라는 세월 동안 좋은 집과 좋은 생활을 다 할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을 생각해서라도 그 정도는 버텼을 수 있을지 않을까 했으나 고작 2달 만에 그의 희생에 대해 떠올리는 사람은 사라져 버렸고 그를 짐으로만 여겼다. 그리고 마지막엔 그의 죽음에 감사해하기까지 했다.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현실이면서 가족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면서도, 눈을 돌려 제삼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가족들에게 질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불쾌한 소설. 그것이 이 책의 묘미가 아닐까 생각된다.


당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삶의 가치는?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며 우리 삶에 팽배해 있는 물질주의에 대해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레고르'를 제외한 작품의 모두가 그를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며 멸시하지만, 유일하게 그레고르는 가족들이 자신 때문에 일을 해야 하는 현실에 슬퍼하며 아끼는 동생에게 "꼭 네가 원하는 음악대학에 보내주겠다."라고 얘기하지 못한 사실에 안타까워한다. 쓸모에 의해 사람의 가치가 정해지는 세상. 남은 가족들이 그런 생각을 갖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조금 더 나은 결말이 찾아왔을지 모른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한국인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삶의 가치를 '돈'이라고 선택했다는 통계를 보았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빈국도 아닌데 대체 왜 이럴까? 한국은 굉장히 발전한 나라이다. 당장 당신이 지금 단신으로 바깥세상에 떨어진다고 생각해 보라. 물론 삶의 질은 떨어질지라도, 사치 부리지 않고 수도권이 아니더라도 적당한 가격의 집에서 월세로 살며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생계는 유지할 수 있다. 심지어 국가에서 지원하는 여러 정책들을 적당히 활용하면 가끔 끼니 해결도 가능하며, 저축은 못하더라도 굶어 죽지는 않는 삶은 충분히 가능하다.


이렇게 사는 게 대체 무슨 의미인가 싶겠지만, 6.25 전쟁을 겪었던 시절을 잠깐 떠올려보기만 하더라도 따뜻한 집에서 바람을 피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시절이 있음을 떠올려보면, 우리가 이런 생활에서 느끼는 불행이 단순히 '살 수 없어서'가 아니라 '남들보다 멋들어지게 살 수 없어서'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왜 꼰대같이 50년대를 얘기하냐, 지금 우리는 발전했고 그때랑 기준이 달라진 게 당연한 거 아니냐?라고 묻는다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라. 전쟁터에 나가서 내가 따르지도 않는 독재자의 야심을 위해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을 쏘는 삶과 비교해 보면 알바만 하는 인생이 그리 초라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 다시 생각해 보자. 당신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정말 돈 때문일지라도, 이는 완벽하게 '상대적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는 아무리 당신이 돈을 많이 벌어도 해결되지 않는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새로운 갖고 싶은 물건들은 끊임없는 광고로 당신을 유혹할 것이고, 당신이 아무리 고생해서 좋은 차와 집을 모두 가졌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는 당신보다 20살 어린 나이에 이미 그런 부를 갖추고 더 많은 명예를 얻었을 것이다. 당신이 아무리 모든 걸 다 이루었다고 생각해도 당신보다 물질적으로 충만해 보이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널리고 널렸다. 돈을 좇겠다고 마음먹었으면 최소한 당신 주변에 등장할 모든 사람들보다는 잘 나가야 한다.


결국 우리는 다 함께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마치며

이런 '부의 상대적임'을 필자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으며, 이를 추구하면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따르게 된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비교문화는 굳이 SNS 같은 것을 얘기하지 않더라도 우리 스스로가 뼈저리게 느끼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이 사이클에서 벗어나려 해도, 주변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을 추켜세우는 것을 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지는 그런 마음이 드는 게 참 안타깝다.


사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나, 단순한 원인 역시 필자는 제공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필자는 카프카가 우리에게 이런 소설을 쓴 이유 중 하나는, "벌레가 된 순간까지도 가족만을 생각해 온 그레고르보다, 물질주의를 숭배하는 우리가 벌레만도 못한 존재가 아니냐"라고 외치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벌레도 싫지만, 벌레만도 못한 존재는 더 싫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확실히 감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빈대처럼 말라비틀어진 자신의 몸을 생각하니 두렵고 겁이 나서 벌벌 떨렸다. 그런데 어느새 그는 자신도 모르게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레고르 잠자의 재변신> 中 일부

실제 카프카의 소설은 그레고르가 죽으며 끝이 나지만, '칼 브란트'가 이 이후의 내용에 대해 쓴 소설을 보면 쓰레기장에 버려진 그레고르가 다시 인간으로 변신하며 끝이 난다. 가족들은 그를 보고 뭐라고 할까? 내가 그레고르라면 가족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참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이 소설 '변신', 물질주의로 고통받는 우리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불쾌감과 자기반성을 하게 만드는 작가의 이 작품은 다만 우리의 생각에 거대한 충격을 준 것이 확실하다.


Ein Buch muss die Axt sein für das gefrorene Meer in uns
책이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가 되어야만 한다.
-프란츠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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