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시절의 서랍을 열면 무엇이 쏟아져 나올지 알 수 없다
1994년 여름이 무척 더웠다는 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오죽 더웠으면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해가 되었고, 응답하라 1994라는 드라마까지 만들어졌다. 1997년이 IMF로, 2002년이 월드컵으로 기억된다면 1994년은 무더위로 기억된다. 그 해 더위를 유난히 기억하는 사람들 안에 나도 있다. 그러나 내가 1994년을 기억하는 건 무더위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 사람들이 집과 공공시설에 강박적으로 에어컨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94년의 무더위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1994년을 지나며 나를 지키기 위한 껍질을 강박적으로 만들어 냈을 것이다.
1994년에 나는 인천과 파주에서 살았다. 아빠의 낡은 봉고를 타고 일 년 내내 인천과 파주를 오갔다. 토요일 오후에 학교 앞에는 에어컨이 고장 난 봉고가 기다리고 있다. 나와 동생은 더위사냥으로 더위를 사냥하며 파주 ‘세컨드 하우스’로 주말살이를 떠났다. 그리고 단 이틀 밤을 자고 월요일에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엄마가 만들어준 일주일치 반찬을 챙겨서 파주에서 인천까지 등교했다. 월요일 아침에는 자유로에서 빠져나오는 길에 차가 너무 많았기에 아빠의 봉고는 끼어들기를 시도하다 경찰 단속에 걸리곤 했다.
파주
주말에는 파주 시골 교회에서 예배를 하고, 금촌 시내에 나가 목욕도 하고, 엄마 아빠와 모처럼 삼겹살도 구워 먹기도 하면서 시골 아이처럼 지냈다. 마당에는 꽤 큰 잔디밭이 있고 우리가 살던 시골교회 뒤로는 텃밭이, 그걸 넘으면 바로 얕은 산이었다. 밤을 주워 먹고 고구마를 심어 먹고 각종 채소를 길러서 가난한 밥상을 채웠다. 지금이라면 전원생활도 나쁘진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땐 너무 가난했기에 낭만이라고는 별로 없었다. 파주의 겨울은 너무 춥고 여름은 너무 더웠다. 엄마와 아빠는 종종 싸웠다. 새벽에 대북방송으로 시끄러웠고 골목길을 지나 포장된 도로로 나가면 군용차가 다니고 행군하는 군인들과 마주쳤다.
파주로 이사 간 첫겨울에, 당장 잠들 방이 모자라자 아빠는 꽁꽁 언 땅에 장작불을 지펴 표면을 녹여서 평평하게 다졌다. 값싼 목재를 사들여 기둥을 세우고 천장을 얹고 방에 보일러를 시공하고 창문과 문을 다는 작업을 아빠가 혼자서 다 했다. 아니 내가 아빠의 조수였다. 일주일이나 열흘 정도를 고생했던 것 같다. 중학교 겨울 방학은 친구들과 모여 앉아 만화책이나 읽고 라면이나 끓여 먹으면 좋았을 때지만 나는 추위 속에서 아빠와 함께 집을 지었다. 내가 아빠 옆에서 어설픈 솜씨로 남는 나무토막에 못질을 하거나 대패질을 해 보려 하면 아빠는 나에게 도구를 다루는 방법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나는 이때 아빠에게 못질, 톱질, 대패질 같은 소소한 목공 기술을 익혔다. 남는 재료로 작은 의자 같은 것을 만들어 보고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시골로 떠난 엄마는 마늘까기 부업을 했다. 파주에서 엄마는 취직도 할 수 없고 노점상도 할 수 없어서 매주 마늘을 세 포대나 다섯 포대씩 받아놓고 내내 그걸 까느라 손이 부었다. 주말이나 방학에는 나와 동생도 도왔다. 그때 마늘 한 포대 까면 받는 돈이 오천 원 정도밖에 안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세 모녀가 달려들어 몇 시간 쪼그리고 앉아 물에 손을 담그고 마늘 냄새를 감당한 결과가 오천 원이라니. 부조리도 이런 부조리가 없었지만 시골에는 일거리가 없으니 그거라도 해서 더위사냥과 메로나를 사 먹고 가끔 삼겹살도 사 먹을 수 있었다.
나와 동갑이지만 생일이 빨라 학교에 일찍 들어간 사촌은 고등학교를 1학년치고는 꽤 성숙한 모습으로 파주의 시골집으로 놀러 왔다. 중학생인 내가 생전 처음 커피숍이란 데 들어간 게 이 때다. 사촌은 금촌 시내 커피숍에 다리를 착 꼬고 앉아 보란 듯이 디스를 주문했다. 그때는 커피숍에서 담배를 팔았다. 지금 생각하면 믿기 어렵지만 어린 학생이라도 어른 흉내를 내면 모른 척하고 담배를 파는 가게도 있었나 보다. 여기 커피 한잔 하고, 아이스티 한 잔 주시구요. 디스 있나요? 네, 디스도 하나 주세요. 분명히 그렇게 말했고, 아무렇지 않게 디스가 음료와 함께 나왔다. 디스가 뭔지 그제야 알아들은 나는 당황해 눈 둘 데를 모르고 사촌은 익숙한 듯이 찬찬히 담뱃갑을 톡톡 두드리고 껍질을 깠다. 담배를 피워 물며 불을 붙이더니 그래, 넌 요즘 어떻게 지내? 하며 소설 속에서나 나올 말투로 어른 흉내를 냈다. 타짜에 나오는 정마담 같은 분위기를 풍기려 애쓰는 앳된 소녀, 그게 사촌이었다. 소설을 많이 읽은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우스웠지만 아무 말도 못 했다. 웃자란 사촌은 우리 집이 군부대 근처라는 데서 흥분하며 자기가 어떤 남자든지 꼬실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쳐댔다. 사촌은 고등학교 졸업도 마치지 못하고 일을 하다가 스물한 살엔가 결혼했는데 남편과 함께 꽤 큰 입시 미술학원을 운영하다가 지금은 딸 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가서 잘 살고 있다. 나는 사촌이 잘 사는 게 한동안 배 아팠다.
인천
열여섯 살에 나는 처음으로 자취라는 것을 해 보았다. 내가 살던 곳은 5층 상가 건물 옥탑방. 5층에는 엄마 아빠가 잘 아는 작은 교회가 있었고 옥탑방은 그 교회에서 사용하던 공간으로 오갈 데 없는 우리 형편을 생각해 빌려주셨던 것이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동생과 나의 도시락을 싸고 동생을 깨워서 학교 갈 준비를 하고 만원 버스를 타고 30분 거리의 학교로 등교했다.
인천에서 살 수 없게 된 엄마 아빠가 파주로 이사를 가면서 우릴 두고 간 까닭은 퇴거를 못 했기 때문이고 그 때문에 우릴 전학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퇴거를 못 한다는 게 뭔지 지금도 모르겠다. 아마 빚에 쫓겨 사람들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이사를 가야했을 것이다. 퇴거를 안 하고 이사 가서 지내다가 주민등록이 말소되고 그걸 나중에 다시 살리고 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중3인 나와 중1인 동생이 둘이 사는 집은 당연히 엉망이었다. 옥탑방은 잠깐 동안 우리 학교 일진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했다. 내가 자취한다는 걸 알게 된 '날라리' 친구가 너네 집에 놀러 가도 돼? 했고, 엄마 아빠랑 살 때 가난한 집을 보이기 싫어 친구를 집에 초대해 본 일이 거의 없는 나는 자취방은 괜찮다고 생각했기에 당연히 와도 좋다고 했다. 그 친구는 노는 무리에 속해 있었지만 경계심이 들게 만드는 아이는 아니었다. 그날 저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데, 그저 노는 애들 여럿이 모였으니 재밌게 놀았던 것 같기도 하고...(공학이라서 친구들은 여자, 남자가 섞여 있었다.) 하여간 중3 밖에 안 된 아이들이 그날 우리 집에서 잤던 걸까? 아침에 학교에 가는데 나에게 먼저 가라고 해서, 나는 동생을 챙겨 도시락을 싸서 등교했다. 그리고 친구들은 모두 그날 학교에 안 왔다.
학교 끝나고 서둘러 집으로 가보니 난리가 나 있었다. 냉장고에 있던 일주일치 식량이 싹쓸이 됐다. 방에는 쓰레기가 굴러다니고 옥상은 담배꽁초와 음료수 캔으로 어질러져 있었다. 남자아이들과 여자아이들이 섞여 있었기에 또 무슨 짓을 했을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동생은 언니가 이상한 친구들을 불러들였다며 엄마에게 이르겠다고 난리를 쳤고 나는 너무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어하면서 그들이 어지른 걸 치웠다. 내 잘못이지, 내가 친하지도 않은 아이를 초대해서, 날라리라는 걸 알면서도 걔넬 불러서, 내가 너무 멍청하다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 친구들은 다시는 놀러 오지 않았지만 나는 엄마에게 크게 혼나고 일주일을 거의 굶어야 했다.
부모의 보호와 보살핌이 없는 상태에서 중학생 자매가 둘이 살며 일 년 동안 매일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간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1994년이던 그때는 사회복지의 개념도 없고, 학교에 상담 시스템 같은 것도 없어서 사회적으로 배려받지 못했다. 그리고 이 해에 사춘기 시절 가장 큰 상처였고 가장 수치스럽고 치욕스러운 기억이 들어 있다.
어느 날, 아침에 알람을 놓쳐서 일어나지를 못했다. 지각을 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기에, (지각을 하면 크게 혼나니까 그걸 회피하려면 차라리 결석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는 교사가 몽둥이로 사람을 패는 게 당연하던 시절이니까) 나는 학교에 전화를 해서 담임에게 거짓말을 했다. 어제 파주 집에 와서 잤는데 아침에 차가 고장 나서 못 가게 되었다고. 자세히 기억나진 않지만 대충 그런 핑계였다. 그때는 아파도 학교에 가서 쓰러지는 게 당연한 세상이었기에 단순히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학교를 빠질 순 없었다. 담임은 그럼 어쩔 수 없겠구나 하고 전화를 끊어놓고, 오후에 파주에 있는 우리 집에 전화를 걸어 부모님과 통화를 했다. 결석 한 번 해 보려던 내 거짓말은 금방 탄로 났다.
아빠는 내가 거짓말하고 학교에 안 간 것을 탓하지 못했다. 부모가 곁에서 보살피지 못하고 있으니까 자책감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선생님에게 거짓말할 거면 엄마 아빠한테도 말했어야지. 미리 입을 맞췄어야지... 선생님이 알아버렸는데 어떡하냐.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 그랬다. 없는 형편에 자식을 키우다 보면 엄마 아빠가 애들에게 성실이나 정직을 가르치기 힘들다. 본인들도 그렇게 살기 힘드니까.
다음 날 학교에 가니 선생님이 발칵 뒤집혀 있었다. 담임은 교사가 된 지 이제 겨우 3년 차인 대체로 상냥하고 고운 여자 선생님이었다. 나를 교무실로 불러 왜 거짓말했냐고 다그치면서 "너 사고결이 얼마나 무서운 건 줄 알아?" 했다. 결석도 같은 결석이 아니다. 거짓말을 했어도 차라리 아파서 못 간다고 거짓말을 했으면 문제가 안 되었을까? 모범생으로 자란 교사에게 사고결이란 인생이 종칠 수도 있는 중대한 결함으로 여겨졌던 걸까? 아프면 병결이고 이유 없이 빠지면 사고결이다. 사고결이 뭐가 어때서? 학교 한 번 안 갈 수도 있는 거지.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난리를 치는 선생님이 이해가 안 됐다. 고입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 혹시라도 내게 불리한 일이 생길까 걱정된다는 담임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내 인생이다. 부모의 보살핌도 없이 한 학기 동안 자취하면서 동생 도시락까지 싸가며 등교하는 내가 그걸 하루 못 해냈다고 인생 종칠 경악할 실수인 것처럼 몰아붙이는 것이 억울하고 화가 났다. 거짓말한 게 화나면 거짓말을 문제 삼지, 사고결 때문에 걱정되어서 다그친다는 말이 싫었다. 사고결 하루 때문에 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한다면 그건 세상이 미친 거지. 별 어려움 없이 모범생으로 자란 데다 예쁘고 잘난 선생님 앞에서 가난을 들키고 거짓말을 들킨 수치심과 반항심으로 순간 내 마음이 뒤틀렸다. 담임은 나에게 거짓말한 것과 결석한 것에 대해 사과문을 쓰라고 했고 나는 반성문이 아니라 반항문을 썼다. 선생님은 진정한 선생이 아니라는 식으로 썼던 것 같다.
담임은 얼굴이 빨개져서 몽둥이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평소의 타닥타닥하는 경쾌한 발소리가 아니라 쿵쿵 걸음걸이로 분노를 표현하면서 교실 문을 홱 열어젖히곤, ㅇㅇㅇ 당장 나와! 하며 무섭게 나를 불렀다. 어쩌라고? 불꽃이 튀었다.
담임은 옥상으로 나가는 컴컴한 문 앞 창고로 나를 데려가서 매로 내 엉덩이며 허벅지를 되는 대로 마구 때렸다. 한 열 대는 맞았나? 뭘 잘못했으니 손바닥 몇 대, 종아리 몇 대.. 이런 것도 아니고 되는대로 마구잡이로 매타작을 하는 선생님이라니. 나는 학생 앞에서 감정조절도 못하는 되지도 않는 인간에게 맞고 있다는 사실이 치욕스러워 더 아무렇지 않은 듯 맞았다. 속으로 실컷 비웃는 마음이 되었다. 곱상하게 자란 아가씨, 평생 어려움이라고는 모르고 자라 부모님과 떨어져 자취를 하는 자기 반 아이가 매일 아침 어떻게 등교투쟁을 벌이는지 알 리가 없는 선생님, 사고결 한 번에 하늘이 무너진다고 호들갑 떠는 선생님, 어쩌라구요. 제 인생입니다~? 그랬던 것 같다.
저 사건 이후로 담임은 내가 엇나갈까 걱정되었는지, 우리 부모님이 사과를 해서인지 대체로 나쁘지 않게 지냈다. 그러나 내가 사춘기 시절 그 선생님 때문에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었다고 여긴 것처럼, 그 선생님도 내가 교사 인생에 최초의 난제였을 것이다. 나는 이전까지 원래 반항이라고는 모르는 오히려 선생님을 좋아하고 학교를 좋아하는 천진난만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갑자기 눈을 빛내며 매를 처맞고 있었으니 자기가 뭘 잘못 건드리긴 했나 하며 간담이 서늘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그냥 속으로 끔찍이 싫어하고 혐오하면서 어쩔 수 없이 괜찮은 척 체면을 차린 거였을 수도 있다.
이건 하나의 에피소드일 뿐 중3 담임은 내가 만난 교사 중 최악은 아니다. 정말 쓰레기 같은 교사가 많았던 시절이니까. 한창 예민한 시기에 가장 감추고 싶은 모습이 까발려진 경험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때 그 선생님을 만난다면 사과하고 싶은가? 전혀 그렇지 않다. 모든 게 오해였을 수도 있고 담임은 정말 나를 걱정했는데 내가 예민한 것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때 나는 어쩔 수가 없었다. 가난, 불성실, 거짓말을 들켰을 때 당황한 고양이처럼 발톱을 세워 상대를 긁는 것은 본능 같은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어렸고 그는 선생이었다. 그에겐 너무 쉬운 ‘사랑의 매’가 있었고 그는 그걸 마음껏 휘둘렀지만 나는 그의 뺨 한대도 칠 수 없었으니.
사실 일 년 동안 자취를 한 건 큰 경험임에도 이 외에 기억에 남는 일이 많지 않다. 어릴 적 일은 꽤 많은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나로서는 그게 좀 이상해서 괴로웠던 이 시기를 봉인해 버린 게 아닐까 의심도 든다. 중학교 시절에 대한 생각을 계속하면 뭔가가 더 떠오를까? 기억을 건드리는 것이 무섭다. 또 어떤 수치심과 열등감, 고통과 분노가 딸려 나올지 알 수 없어서다. 그래도 1994년은 1993년이나 1995년보다는 기억나는 일이 많은 것이다. 그해 여름의 무더위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해 여름을 주기적으로 상기시키는 콘텐츠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