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풍기
여름을 보내며
우리 집엔 15년이 된 선풍기가 있다. 은색 스틸로 만들어진 선풍기는 달달달 소리를 내지만 고장 한 번없이 여름을 책임지고 있다. 3개의 팬이 돌아가는 사이로 목소리가 겹쳐지는 것이 재미있어 선풍기 앞에서 아아아 하며 함께 달달달 떨었다. 선풍기 발 아래에는 웬 남자 두 명의 캐리커쳐가 그려져 있었고 엄마는 항상 그 마크를 보며, '모터는 이 회사가 잘 만들어.'라고 말했다.
선풍기는 내가 3살이던 무렵에 산 것이라고 했다. 동생이 태어난 여름이 너무 더워 집에 선풍기가 필요했다고 했다. 엄마는 반찬값을 아껴 만든 누런 봉투를 들고 동네에서 가장 큰 마트로 갔다. 점원이 추천한 신제품들 속에서 엄마는 두 남자가 그려진 마크만 찾았다. 커다란 선풍기는 엄마 등에 엎여 왔다. 처음 동생이 우리 집에 오던 날도 그랬다. 난 선풍기에게 질투가 나서 한참을 째려봤다. 동생과는 다르게, 선풍기는 우리 집에 평화를 가져다 주었다. 퇴근 후 아버지의 짜증 섞인 목소리는 선풍기의 ON 버튼을 누르면서 사라졌다. 그 뒤로 나는 안방에서 큰 소리가 들릴 때마다 선풍기를 껐다 켰다. 엄마는 가스레인지 앞에서 땀을 흘릴 일이 적어졌다. 나는 선풍기에 손을 넣지 말라고 잔소리를 들어야 했지만 빙글빙글 돌아가는 선풍기 팬을 한참 동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매일 큰 소리로 울어 재끼는 동생에 비하면 천 배 만 배 나았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 됐다. '엄마는 우리 딸이 벌써 10대가 되었구나' 하고 기뻐했다. 난 한동안 허리를 곧게 펴고 다녔다. 의젓하게 행동해야 할 것 만 같았다. 선풍기는 아직도 쌩쌩했다. 여름이면 가족이 모여 앉아 수박을 잘라먹었다. 쟁반 앞에 놓인 선풍기는 우리 집의 여름을 항상 그렇게 훔쳐봤을 터였다. 가끔은 선풍기도 덮지 않을까 싶었지만 달달달 소리를 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혹여나 모터가 뜨거워지면 잠시 식혀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렇게 선풍기는 여름 한 철을 가족과 함께 지내다가 바람이 불면 아무 말없이 사라졌다. 겨우내 선풍기는 창고에 들어가 제대로 된 햇빛 한 번을 쐬지 못했다. 그러다가 다시 날이 더워지면 제 자리를 찾은 듯 열심히 팬을 돌렸다. 하지만 늘 묵묵하게 자리를 지켜주었다. 문득 선풍기 같은 사람이 정말 필요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선생님이 장래희망을 물었을 때, 난 '선풍기가 되고 싶어요'라고 했다. 선생님은 '사람은 기계가 될 수 없어'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바보 같은 말을 했다는 듯이 날 쳐다봤다. 얼굴이 벌게 진 나는 주저앉듯 간신히 의자를 찾아 앉았다. 허리가 다시 구부려졌다.
엄마는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양문형 냉장고가 나와도 예전에 쓰던 냉장고에 성에가 끼어 더 이상 쓰지 못할 때 까지 바꾸지 않았다. 어느 주말 아버지는 맥주가 시원하지 않다며 사거리에 있는 하이마트에 가 냉장고를 사왔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한 한 뒤로도 우리 집 여름은 선풍기와 함께했다. 아빠는 회사에서 에어컨 바람을 쐬면 족하다고 했고, 엄마는 가끔 은행이나 백화점을 가면 된다며 에어컨 구입을 미뤘다. 나나 동생도 학교에서 에어컨을 쐬는 걸로 충분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한 선풍기는 여전히 뱅글뱅글 거실을 돌아보고 있었다.
선풍기는 내가 개학을 앞둔 8월의 어느 날에서야 멈췄다. 엄마가 낮잠을 자는 사이에 예약을 맞춰둔 채로 선풍기는 숨을 멎었다. 엄마는 고치면 된다고 했지만, 아빠는 궁상도 작작 떨어라며 하이마트로 향했다. 정지를 30분 앞둔 은색 스틸 선풍기는 15년의 생을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마감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선풍기는 현관 앞에 놓여 있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 집에 있었지만 한 번도 선풍기가 서있지 않은 곳이었다. 나의 오래된 선풍가 있던 자리에는 날개가 5개나 되는 하얀 색의 선풍기가 윙윙 돌아가고 있었다. 새로 들어온 선풍기엔 남자 캐리커쳐는 없었지만 영어로 같은 상호명이 쓰여 있었다. 선풍기는 틀어놓은 것 같지 않게 조용했고, 달달거리는 소리도 없었다. 바람도 창문을 타고 들어온 것처럼 선선했다. 엄마는 버릴 선풍기를 걸레로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는 궁상이라며 혀를 찼다. 나는 옛 선풍기의 타이머를 정지에 맞춰주었다.
끝.
개인적인 추억을 각색한 픽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