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그래서 난 어른이 되었을까?
'시작'이 난무하는 1월. 나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시작이랄 게 있었나. 모든 것은 찰나로 지나가는 허상일 뿐, 처음과 끝이라는 단어조차 식상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생각해보면 어릴 적, 그러니까 학창시절까지만 해도 나는 시작이라는 단어에 설레었다. 분명히 그랬다. 누군가가 정한 시작을 주변에서 바통 터치하듯 이어 말하기 시작하면, 내 주위에 모든 것은 바뀌었다. 같은 반 아이들의 얼굴이 달라졌고, 담임 선생님이 달라졌으며, 교복에 반질반질한 윤도 더해진 것만 같았다. 심지어 네 번 계단을 올라 열 발자국 이면 닿던 반도, 여섯 번의 계단과 스물두 번의 발자국으로 늘어났다. 난방을 하지 않아 차가운 학교의 공기도 싸늘하기 보단 익숙한 푸근함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있는 것 같았지만 상황에 밀려 시작점에서 한 발자국씩 내딛기 시작했고, 내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침표를 찍었다. 달라짐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설렘이 앞섰다. 미성년자이기에 가능했던 모든 변화였고, 덕분에 난 늘 새로운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 당시의 난,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나를 뚤러싼 모든 것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정확히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랬던 것 같다. "난 어른이 되기 싫다"는 말을 습관처럼 뱉어냈으니...
성인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던져질 나는, 한 발자국 내딛을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 난 두려워했다.
또다시,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어른이 돼버렸다. 미성년자로서 겪은 마지막이자 최악의 변화였다. 열아홉이 스무 살이 되던 그 시간, 나는 속절없이 돌아가는 시계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을 흘기고 마른침을 삼켰지만 시간은 더디게도, 빠르게도 가지 않았다. 늘 그렇듯, 시간은 독선적이고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렇게 난 성인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간혹, 아직은 만 19살이라고 말해주는 약봉지에 위안하며.
의외로 독립은 빨랐다. 대학에 들어와 자취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학자금 대출을 받아 들어간 학교에서, 100만 원의 기숙사비를 받은 것 빼고는 전부 내 힘으로 버텼다.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불안했지만 그래도 살고는 있구나 싶어 내심 스스로가 대견할 때도 있었다. 물론 오래가지는 않았다. 1교시에 지각을 몇 번, 끼니를 거르고 대충 라면으로 며칠을 버텼을 즈음에도 자각하지는 못했다. 그저 과제에, 모임에, 인간관계에 치여 그랬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래도 영 힘들 때는 부모님이 도와주시기라도 했으니, 난 벽에 부딪힌다는 게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늘, 구원당했다. 그럴 때면 학창시절 그랬던 것처럼 "어른이 싫다. 어렵다.'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난 언제부턴가 내 나이를 기억하지 못했다. 올 해에도 마찬가지였다. 2016년 제야의 종이 울렸을 때도, 모두가 나이 먹음에 한탄할 때, 난 내 나이를 떠올리지 못했다. 몇몇 새해 문자가 도착해서야 알게 되었다.
"넌 이제 스물일곱이야. 이십 대 후반에 접어든 여자라고!"
<지금까지 그랬던 거처럼 스물일곱도 잘 지내자>는 친구의 카톡은 나에게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머릿속 적당한 문구를 골라 답장을 보낸 뒤 나는 초조해졌다. 이십 대 후반, 더 이상 어른이 되기 싫다고 하기엔 시간이 허락 하지 않는 나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른 문제였다. 마침 원고를 쓰던 월간지가 폐간되고, 밥벌이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을 때였다.
나는 뭐 하는 인간이지
스물일곱이 되는 동안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생각해 본 적 없던 화두가 내 머릿속을 지배했다. 놀랍게도 정말 단 한 번도 난 내가 뭐하는 인간인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며 좌절하기엔 너무 늦은 것만 같아 난 계속해서 내가 뭐하는 인간인지를 찾아야 했다. 지금 찾지 않으면 이대로 어영부영 누뜨고 밥 먹고 대충 살다가 노후대비도 없이 늙어 놀이터에서 멍 때리는 늙은이로 남을 것이 분명했다.
생각은 끝내 어른과 아이의 중간에서 멈췄다. 물을 이리저리 튀기면서 뭔지 모를 경계선을 마구잡이로 헤집고 다녔다. 눈에 보이는 건 다 잡아보려고 했다. 딱 익사하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잡았다 하면 끊어지고, 다시 가라앉길 몇 번, 이번엔 반드시!라는 심정으로 잡은 나의 생명줄은 어찌 된 영문인지 '시작'이었다. 시작이라는 단어가 설레지 않을 때, 그때부터가 어른이 아닐까. 난 처음으로 내가 어른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어른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시작하지 않았기에, 누구도 변해주지 않았기에, 나는 시작이니 출발이니 하는 것들을 식상하게 느꼈던 것은 아닐까. 나만 빼고 전부 앞으로 가는 것 같아 초조했던 마음도, 같은 맥락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되어버렸고, 그렇게 한 발자국 내딛지 못한 어른으로 멈춰 있었다. 왜 여유를 주지 않느냐고, 어른이 될 시간이 필요하다고 시계를 째려볼 뿐, 나는 투정만 부리는 미성숙한 20대를 보내고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뭔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됐다. 뭐든 하는 인간이 되어야만 했다.
난 집안 가구를 옮겼다. 알람을 한 시간 일찍 당겼다. 책을 읽는 시간을 정하고, 글을 쓰는 시간을 늘렸다. 할 수 있는 건 그것 뿐이었다. 운동을 시작할까 하다, 작심삼일로 끝나버릴 게 뻔해 시간 날 때 동네 공원이나 한 바퀴 돌자며 타협했다. 소심한 변화지만 나름 성과가 있었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야 했고, 글을 쓰는 동안은 나를 작가라는 이름에 조금 더 가까워지게 했다. 가장 중요한 건, 나는 그게 뭐든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른이 되었을까?
대답은 글쎄. 어른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되는 건 아니잖아? 그저 뭐라도 하면서, 시간을 흘겨보기 보다는 적절히 이용하면서, 그렇게 살다 보면 그러면 언젠가는 어른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 날이 오지 않을까.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이제 시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