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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된 추억도 정리해야겠어요

남겨질 흔적도 정리해야 이별 준비가 편해지겠네요

by 하화건

얼마 전 가족들이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죠. 언제나처럼 조카 손자의 재롱을 보면서요. 특히 어머니께서는 증손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하셔서 시간이 될 때 되도록이면 잠깐이라도 모이려 노력하고 있거든요. 그것만으로도 큰 효도여서 가족들 모두 신경 쓰고 있죠


옛날이야기부터 요즈음 일어난 에피소드들까지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었죠. 그러다 큰 조카가 뜬금없이 "할아버지 흑백으로 된 옛날 사진 있어요?"라고 묻는데 좀 당황했습니다. 사진이 없어서가 아니라 저 역시 최근에는 잊고 지내던 사진 이야기를 꺼내서였죠. 사진들은 당연히 잘 정리되어 있었는데도요. 다만 아버지 돌아가시고 처음으로 사진에 대한 말이 나와서 순간 당황했죠. 아버지에 대한 얘기는 수시로 나누었어도 사진에 대해서는 처음이었거든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네요. 지금이야 시간이 지나서 마음이 많이 안정이 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감당하기 어려워할 만큼 힘들어했죠. 인정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그럼에도 살아가야 했기에 무엇이라도 해야 했죠. 아버지를 온전히 보내드리기 위해서 제가 한 행동 중 하나가 사진 정리였습니다. 결국에는 가지고 있던 가족사진들까지 모두 다 정리하게 됐죠. 오래된 사진첩 대신 새 사진첩에 가족별로 잘 정리를 하고서 뿌듯해했던 기억이 나네요


정리가 끝나고서는 자주 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뜻대로 잘 되지 않았죠. 거의 보지 않게 되더라고요. 멀리 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소중한 기록들을 잘 보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주 보면서 기억하는 게 더 의미 있는 일일 텐데 정작 그러지는 못했어요. 죄송스러웠고 마음에 많이 걸렸죠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그런 걸까?" 의문이 생겼어요. 사진으로라도 생전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음을 감사해하면서 정작 행동은 하지 않는 게 궁금해지더군요. 저 자신을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여전히 저 자신에 대해 모르는 게 많다는 걸 깨달았죠. 어렴풋하게나마 '내가 피하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니 사진을 정리해 두는 것만으로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어요. 누군가를 그리워한다기보다는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행동이 아니었나 싶었죠


며칠간 고민을 많이 했어요. 소중하고 중요한 것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요. 답을 알고 있으면서 계속 피하고 있었죠. 다른 방법이 없을까 궁리를 해보는데도 도저히 다른 답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명치끝이 꽉 막힌 듯 답답한 나날을 보냈죠. 그리고 마침내 결론을 아니 선택을 했어요


모든 사진첩을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제가 디지털화해 둔 것들도 포함해서요. 제 것들 역시도 언제인가 모를 그날을 위해 늦기 전에 정리를 해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준비 없이 지내다 갑자기 저를 전혀 모르는 누군가에 의해 의미 없이 기억들과 기록들이 사라진다는 생각만으로도 싫었거든요. 아무리 박제된 거라 해도 제게는 소중한 추억이 담겨 있는 것들이니까요. 자연스럽게 정리할 건 스스로 정리를 마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다른 사람 손 타는 게 그렇게 싫게 느껴지더라고요

마음을 먹으니 묘하게 편해졌어요. 한편으로는 쓸쓸함도 밀려왔지만요


마음을 정했다고 해서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죠. 물론 저에 한정된 건 제외였지만요

우선 가족들에게 동의를 구해야 했어요. 다들 아쉬워하더군요. 일단은 사진들을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어요. 필요한 게 있으면 가져도 된다는 말과 함께요

언제 다시 제게 돌아올지는 솔직히 모르겠어요. 온전히 다 돌아올지 아니면 일부는 가족들에게 남을지도 알 수가 없네요. 그럼에도 그전까지 정리할 방법을 생각해 놓으려고요. 마음도 함께 정리하면서요


누군가는 "너무 빠른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예요. 저 역시도 고민했던 부분이니까요

그렇다고 일찍 준비한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기에 제 생각대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 주변을 보며 하나씩 정리해 보니 되려 삶에 대한 간절함이 더 커지네요.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새삼 깨닫게 되고요. 매일 주어지는 시간이 선물이라는 것도 그리고 매 순간 감사할 것 투성이라는 것도 다시 생각하게 되니 제 자신에게 좀 더 집중하게 됩니다


요즘 신기하게 느끼는 게 있어요. 정리를 위해 그런 거였지만 사진들을 다시 보며 예전 좋았던 기억들을 많이 떠올리다 보니 생활에도 에너지가 계속 충전되는 기분이에요. 예전에는 슬픔 속에 있어서 그랬는지 아쉬움이 컸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전혀 다르게 보이네요

덕분에 내일을 더 기대하며 기쁜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표제의 그림 "이 이미지는 챗GPT를 이용해 생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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