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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의 흠"을 생각하다가

H.N. 소. 우. 주. 지기의 생각을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by 하화건
20210601.jpg 2021년 6월 1일 SNS 게시글

2021년 6월 1일. 무슨 생각을 했기에 이런 글을 썼을까 궁금해서 일기를 들춰봤습니다

역시나 별다른 사건이나 사고는 없었고 여느 날처럼 열심히 살아낸 하루였습니다. 무난하게 잘 살아내서 감사한 그런 날이었죠. 날씨는 약간의 비가 내린 걸로 기록되어 있네요


이날 무슨 일이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페르시아의 흠'에 대해 생각했었나 봅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통 기억이 안 나서 일기를 포함해 여러 기록들을 뒤적여 봤지만 실마리가 될 만한 단서는 찾지 못했어요. 아무튼 '페르시아의 흠'에 대해 듣고 영감을 얻어 글을 쓴 거 같네요. 뭔가 강렬한 느낌이 있잖아요


'페르시아의 흠'에 대해 찾아보니 '완벽함은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에 인간은 일부러 작은 흠을 만들어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걸 인정하기 위해 만든 거'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정의를 듣고 처음에는 '왜 그러지?'하고 궁금함이 올라오다가 어느 순간 무릎을 "탁!" 쳤죠. 장인들의 깊은 철학이 담긴 이야기라 그런지 가슴을 울리는 뭔가가 있어서 여전히 좋아하고 있습니다


2021년 당시에는 감동 같은 감정만 가지고 있었는데 꽤 시간이 지나고 나서 궁금한 게 생기더군요. "정말 페르시아 카펫을 만드는 장인들이 모두 이 정신을 이어받아 '흠'을 만들고 있을까?" 확인해 봤더니 일부러 흠을 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서 좀 실망했죠. 완전한 수공예품에는 자연스럽게 생긴 불완전한 요소는 있을 수 있지만 전통을 따라 표식처럼 하지는 않는다고 하네요. 낭만을 꿈꿨었는데 좀 아쉽더라고요. 그럼에도 그런 상징을 만들어낸 문화는 여전히 부럽네요




'페르시아의 흠'하면 불완전함에 대한 이야기잖아요. 거기서부터 많은 생각들이 시작된 거죠. 지금 생각해도 여전히 매력적인 소재잖아요. 인간의 불완전성, 특히 사고와 가치관의 불완전성에 대해서 다양한 생각들이 떠올랐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날 어떤 생각을 했는지 기억해보려고 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더라고요. 그때는 그때 어울리는 생각을 했을 거고 지금은 '지금 여기'에 맞는 걸 떠올리고 있으니까요. 굳이 예전 그날에 갇혀 있어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뜬금없지만 갑자기 '제주도의 돌담'이 떠올랐어요. 구멍이 숭숭 뚫려있어서 일반적인 담벼락과는 확연히 다른 바로 그 담장이요. 잘 몰랐을 때는 '제대로 구실이나 하겠어' 싶었는데 그 안에 녹아있는 옛사람들의 지혜를 알게 되었을 땐 짧은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오더군요. 조상님들의 지혜에 대해 다시 얘기할 필요가 없을 만큼 다들 아는 거지만 그래도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죠.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는 저까지도 자부심을 느낄 정도니까요


'페르시아의 흠'과 '제주도 돌담'은 불완전함을 품고 있어 닮았습니다. 물론 태생적으로는 다른 점이 많지만요. 우선 '페르시아의 흠'은 인위적인 피조물에 고의적으로 흔적을 남기는 것이어서 신에 대한 경외심의 발로 그 자체로 보면 되겠네요. 반면에 '제주도의 돌담'은 자연환경에 적응하여 살아남기 위한 인간들의 치열한 행동의 결과물이잖아요. 그리고 그 바탕에는 대자연을 향한 두려움과 공경심이 깔려있고요. 자연에 역행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건 '그레질'도 비슷하다 할 수 있겠네요


어떤 경위에서 생겨난 것이든 간에 자신의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게 중요합니다. '페르시아의 흠'처럼 일부러라도 표현하는 겸손함과 그 뒤의 자신감이 제 생각을 환기시켜 주네요. 그리고 '제주도의 돌담'과 '그레질'처럼 자연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순응하면서도 티 나지 않게 공존하는 방법을 만드는 지혜가 새삼 경이롭게 느껴지고요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잔재주에 스스로 도취되어 겸손함을 잃은 적은 없었는지. 무조건 이기겠다는 아집으로 나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힘들게 한 적은 없었는지를요


다시 생각해 봅니다. 어떻게 조상들이 대자연에 순응하면서도 환경을 최대한 활용하는 지혜를 길러낼 수 있었는지. 왜 장인들이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도 스스로를 불완전한 존재로 여겨 겸손함을 늘 새기며 살았는지를요


나이가 들어갈수록 배워야 할 게 더 많아진다는 걸 자주 느낍니다. 여전히 부족하다는 뜻이겠죠. 그런데도 이상하게 창피하지가 않아요. 예전 같으면 모르는 걸 감추려고 헸을 텐데 지금은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갈 길이 아직 멀지만 서두르지 않고 끝까지 가보려고요. 이렇게 배움의 시간을 가질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요



*표제의 그림 "이 이미지는 챗GPT를 이용해 생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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