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차와 글뭉치
요즘은 커피 대신 녹차를 마십니다.
오늘 아침엔 간만에 커피를 들었는데 텀블러에 담긴 갈색이 어쩐지 낯설었습니다.
어금니까지 닿는 씁쓸함이 부담스러워 결국 반도 못 마신 채 화장실에 다 쏟아버리고 말았습니다.
맹물은 도저히 넘어가지 않는 이상한 목구멍이라 어쩔 수 없이 다른 마실 것을 찾아야 했습니다.
카페에서 아이스티를 살까 잠시 고민하다가 연구실 구석에 비치된 녹차 티백을 집어 들었습니다.
차를 좋아한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할머니 덕분입니다.
할머니 댁에 가면 유리 다기가 있었습니다.
어린 나는 투명한 것들이 좋았고, 그래서 다기가 좋았습니다.
할머니는 다기를 쓰는 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각각의 다기를 부르는 이름은 아직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알았습니다.
체망에 메밀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붓고, 투명한 통 아래로 노랑이 똑똑 우러나는 걸 보는 게 좋았습니다.
할머니는 찻잔 받침을 왼손에 얹고, 오른손으로 찻잔을 들어 찰랑이는 차를 맡았습니다.
할머니는 부드러웠고, 나는 어색해서 괜히 입꼬리가 배실배실 올라갔습니다.
메밀은 고소했습니다.
할머니 집 바닥에 앉아 유리 찻잔에 고인 메밀 향을 맡으면 세상이 조용했습니다.
허공에 먼지가 둥둥 떠다니고, 할머니와 동생과 나.
그때 이후로 조용한 걸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찻잔은 데지 말라고 이중으로 만들어져서 적당히 따뜻했습니다.
입술에 닿으면 뜨거워서 호들갑을 떨게 되는데 잡으면 뜨겁지 않은 게 내심 신기했습니다.
차를 우리고, 향을 맡고, 차를 마시고, 다시 우리고.
단조로운 시간에 기분이 들뜨곤 했습니다.
할머니 집에서 유리 다기 다음으로 재밌는 것은 작은 방 책상에 놓인 글 뭉치였습니다.
할머니의 글 속에는 본 적 없는 어린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이젠 글자가 된 나만한 할머니가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지나온 정류장에 두고 온 꿈 보따리를 찾으러 간다고 했습니다.
할머니가 아닌 할머니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할머니의 꿈 보따리를 그날 밤새 곱씹었던 기억이 납니다.
알지 못했지만 곤두박질치던 시기에 글을 쓰겠다고 결심한 데에는 분명 할머니의 영향이 컸을 겁니다.
‘인터스텔라’에서처럼 책장 뒤편에서 할머니가 가르쳐준 걸지도 모릅니다.
덕분에 여전히 글을 씁니다.
거창하게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이런 마음을 꺼내놓을 줄 아는 걸로도 충분합니다.
50년은 족히 먼저 찍힌 할머니 발자국을 봅니다.
시간이 많이 묻었지만 여전히 내 발이 쏙 들어가는 할머니 발자국입니다.
꼭꼭 따라 걷습니다.
쓴 커피 대신 연녹색 녹차를 마시며 할머니의 메밀차와 글 뭉치를 떠올립니다.
그럼 처음 맞는 오늘도 고소한 향기에 휩싸여 살아볼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