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문득 덧없다고 느껴진다면 '나'라는 존재의 위기에 처했다는 말과 같다. 누군가에게 당신은 왜 존재하냐고 물어봤을 때 자신의 신념을 토대로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 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또 나에게 이 질문을 물어 온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흔히 존재의 위기는 한 사람의 가치관과 신념, 삶의 목표의 근원이 혼란 속에 빠져있을 때 찾아온다고 한다. 옳은 말이지만 이것만으론 존재의 위기를 전부 설명할 수 없다. 각 사람의 경우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을 조금 덧 붙인다면 근원적 존재의 위기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비참하다는 열등감이 투영된 '나'와 먼 이상을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 대립될 때 나타나는 듯하다. 이는 남들이 가진 것을 내가 소유하지 못했을 때, 남들과 같은 명예를 얻지 못했을 때, 남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지 못할 때 우리 내면 속에서 싱크홀과 같은 큰 구멍이 생기고 그 안에서 우리의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것과 같다. 여기가 곧 혼돈이며 혼란 속에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참 야속하게도 신은 우리에게 유한한 시간을 선물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늘 무한에 가까운 풍요를 꿈꾸는 존재로 살아간다. 우리의 삶이 무한하다면 우리는 내가 원하는 풍요로운 삶을 모두 취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안다. 결국 우리는 주어진 시간 안에 나의 능력을 발휘하여 내가 원하는 것을 소유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 문제는 시간이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시간은 우리에게 모두 공평하게 주어져있다고. 웃기지 마라. 시간자체는 공평할지언정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것은 절대로 아니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태어났을지라도 이 세상에는 누군가는 풍요로움 속에 누군가는 빈곤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 풍요로운 인간의 삶과 빈곤한 인간에게 시간이 공평한들 무슨 소용인가.
시간은 그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요히 흘러간다는 것 같지만 누군가는 이것을 공평하다고 멍청하게 말하지만 그 시간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아주 잔인한 심판관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정말 모른다는 말인가? 이 말을 듣고 웃기고 있네 시간은 공평해. 인간은 노력하면 다 이룰 수 있어. 이것은 게으른 사람들의 변명일 뿐이야.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높은 확률로 사랑 많거나 물질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나고 살아왔을 가능성이 아주 높을 것이다. 사랑과 물질 둘 중 하나라도 손에 쥐고 존재하게 된 인간의 삶은 풍요롭다.
반면 빈곤의 삶은 처절히 비참하다. 모든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며 꿈을 꾼다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생각하고 상상을 하기 때문이다. 이 생각과 상상이 인간을 인간답게 살아가게 하는 생명의 근원이지만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가장 큰 주범이기도 한다. 풍요로움 속의 인간은 꿈을 실현시킬 가능성이 아주 높으며 긍정적 사고를 가질 수 있다. 빈곤 속의 인간은 꿈을 실현시킬 가능성이 매우 낮으며 늘 부정적 사고를 가질 수밖에 없다. 빈곤한 인간이 꿈을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풍요로운 인간이 가진 물질보다 더 높은 가치의 '재능'이다. 또 하나는 부모의 똑똑함이다. 이것들 마저 가지지 못한 인간은 비참함 속에 갇힐 수밖에 없다. 가진 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높이와 가지지 못한 자가 바라보는 세상의 눈높이는 우주와 땅정도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꿈은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땅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그저 하루하루가 지옥일 뿐이다. 풍요를 바라지만 죽을 때까지 빈곤해야만 하는 사람에게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우린 이 차이를 분명하게 인정해야 한다. 당신이 풍요 속에 있다면 더 이상의 오만과 교만을 멈춰라. 오직 당신의 노력만이 당신을 그 자리에 앉힌 것이 아니다. 또 만약 당신이 빈곤한 인간에 속한다면 반드시 이 차이를 받아들여라.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 자체가지옥일 테니까.
우리 대부분의 사람은 존재의 위기에 빠져있다고 느낄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물질에 지배당하는 대부분의 인간의 삶은 위태롭다는 뜻이다. 당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나는 과연 풍요로운 인간에 속했을까? 아니면 빈곤한 인간에 속했을까? 지금의 세상은 분명 당신이 선택하기에 달려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풍요 속에 빈곤을 선택할 수도 있으며 빈곤 속에 풍요도 역시 선택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이 물질에 관련되어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면 풍요로움 속에 존재의 위기에 빠진 사람도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충분히 풍요로운 사람도 존재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 그 증거다. 스스로 생명을 끊는 일은 언제나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는 빈곤에서 비롯된 존재의 위기를 겪는 않았다는 것 만으로 축복받은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다른 종류의 존재의 위기가 그의 목을 서서히 졸랐을 것이다. 무엇이 이토록 풍요로운 인간을 죽이게 했을까? 명예였을까?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관심이었을까? 아무튼 이 모든 것 역시 인간에게는 끔찍한 고통이다.
결국 각 사람에게 찾아온 존재의 위기는 분명 모두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의미한다. 물질에 비롯되었든, 감정에 비롯되었든 상관없다. 나는 이 근원적 존재의 위기를 열등감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우리는 이 열등감을 스스로 선택함으로 존재의 위기에 빠지고 만다. 즉 인간은 스스로 고통을 선택한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때로는 이 본성이 인간을 생존시키기도 하며 인간을 죽이기도 한다. 인간에게 열등감은 태어나며 갖는 원죄다. 태초의 인간들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 했다. 태초의 살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더 갈구했던 열등감에서 시작되었다. 태초의 인간멸종은 신이 자기가 만든 세상이 열등하다는 것을 느끼고 실행하셨다. 무슨 일이 되었든 결국 인간은 이 열등감 때문에 파멸을 맞이할 것이다.
이런 인간이 열등감에서 벗어나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 자신의 현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의 현실에 만족하라는 말이 아니다. 당신이 지금 머물고 있는 위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 허튼 망상으로 하루를 땅바닥에 내던져버리지 않는 것이다. 내가 가지지 못할 것을 가지려고 애쓰지 않는 것이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에만 삶을 내던져라. 내가 실현할 수 있는 계획만 세워라.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쏟아라. 앞으로 가질 것에만 초점을 두지 마라. 내가 지금까지 이루어 온 것들 또한 역시 소중하다. 남의 인생은 심심할 때 읽는 추리소설과 같은 것이라 생각해라. 남의 인생에 신경 쓸 시간에 일기라도 써보는 것이다. 오늘 먹을 양식이 충분하다면 굶주린 사람에게 내가 가진 양식을 나눠보는 것이다. 오늘 나에게 자유로운 시간이 남아있다면 당신이 믿는 신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나를 성찰해 보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을 때 존재할 수 있다. 그러니 현실을 자각해라. 그리고 오늘을 살아라. 내가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오늘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