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오디오북/영화 모두 추천!
2주 동안, 1.5배속으로 시간을 달려 ‘향수-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다음 언급부턴 줄여서 ’ 향수‘라고 하겠습니다.)의 오디오 북 버전을 다 들었다. 지하철 타는 하루 왕복 1시간 동안 꼬박꼬박 들었던 게 다행이었다. 중간에 많이 졸긴 했지만 이미 3번 이상 완독한 작품이라 흐름은 놓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집중하기 딱 좋게 일정한 톤으로 낭독해 주시는 성우님의 편안하면서도 낮은 목소리도 ‘향수’의 분위기에 딱 맞았다.
‘향수’는 내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핫했던 작품이었다. 이를 토대로 만든 영화도 이미 내가 5학년 때 개봉했었다. 향수뿐만 아니라 살인, 그리고 다소 자극적인 장면이 있어서 학생 땐 영화를 보지 못했지만 대신 책은 고등학생 시절 처음 읽어보았다. 10대 시절에 받아들이기엔 꽤 쇼킹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작가의 치밀한 인물 내/외면 묘사와 흡입력 있는 전개는 내 마음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영화는 생각보다 늦게 관람했다. 아마 대학교 교양수업 '영화와 독서(가제)'의 과제를 위해 내가 이 작품을 고르지 않았다면 영화는 영영 안 봤을 수도 있다. 대학생땐 마음이 급해 1.3배속으로, 오직 과제용으로 영화를 빠르게 훑어봤다. 물론 그렇게 빨리 넘겨도 제작팀의 그루누이에 대한 연출이 아주 세심한 게 보여서 놀랐었다. 영화가 도서를 기반으로 각색하면서 내용이 완전히 똑같진 않지만,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장면들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과제도 수월하게 작성하고 제출했다.
이번 글은 여러 매체 중 영화로서 ‘향수’가 원작에 대한 치밀한 분석력, 또는 영상으로서 세심한 연출력이 보이는 장면 몇 가지를 소개할 것이다.(물론 나의 주관적인 기준으로 장면들을 선정했다.) 영화는 물론 원래 작품의 시작인 책도 매우 추천드리니 여유가 있으시다면 꼭 읽어보시길 바란다. (선도서 후영화 추천드린다.)
아! 글 내용에 아주 많은 영화 스포와 조금의 원작 내용이 들어 있으니, ‘향수’를 읽거나 보실 분은 안 보시는 게 더 나을 수 도 있을 것 같다.
1. 빛과 어둠: 언제나 흐릿한 그의 존재감
대학생 때 봤던 ‘향수’의 여러 장면 중 그루누이와 발디니의 첫 만남이 나에게 가장 강렬했다. 체취가 없기 때문에 그루누이가 남들에게 존재감이 없다는 설정을 이렇게 빛과 어둠으로 명확하게 표현한 센스가 너무 좋았다. 촛불을 가까이 들이밀어야 가까스로 보이는 주인공의 희미한 형체, 그 모습도 불을 꺼버리면 바로 사라질 것 같았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영화나 책이나 공통적으로 주인공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라는 인물은 남들이 다 가지고 있는 하나를 영원히 갖지 못한다. 그것은 바로 개인 고유의 ‘냄새’, 체취. 그는 타고난 후각을 갖고 냄새로 수집해 모든 생물을 존재를 파악한다. 심지어 인간들이 흩뿌리는 향이나 악취로 외모, 성격, 그루누이 본인 눈앞에 없는 공방 여주인과 제자가 은밀한 딴짓을 하는 것도 눈치챈다.
하지만, 이렇게 대단한 능력을 가졌음에도 그는 본인이 혐오히는 인간들 사이에 사 혼자만 ‘채취’란걸 가지지 못했다. 여기서 작품의 매력적인 설정인 체취와 존재감의 연결성이 드러난다. 사람들은 인간이라면 마땅히 갖고 있는 냄새가 없는 그루누이를 육안으로 보기 전까지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툭툭 그를 밀치고 지나간다. 이 작품에서 체취는 곧 개인의 정체성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선천적 결점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사랑받고 싶다는(자신의 진가를 못 알아보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도 섞인) 욕망을 키운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는 결국 매혹적인 13명의 여인의 향을 조합할 계획을 세운다. 그는 본인의 향수, 즉 자신의 정체성을 정의하기 위해 연쇄살인마가 된다.
2. 그루누이의 향수를 완성시킨 붉은 머리 소녀, 그리고 노란색의 의미
그루누이가 무두장이 일을 조용히 굼벵이처럼 버티던 시절, 참을 수 없는, 아니 후각이 뛰어난 본인만 홀렸던 유혹적인 향을 맡는다. 그는 대장 무두장이의 지시도 잊은 채 그 향의 길을 따라가다 탐스런 노란 자두를 팔고 있는 붉은 머리 소녀를 발견한다. 그는 실수로 죽인 이 소녀부터 시작해 여러 여인들의 탐스런 체취를 강탈해 본인만의 향수를 만들어간다.
가장 마지막에 살해된, 그루누이가 혼신을 담아 만든 향수의 심장을 담당하는 로라. 정확히 말하면 향수의 심장은 누구에게나 사랑스러운 로라가 갖고 있던 '정체성‘을 의미한다. 원작 도서에선 아버지를 따라 수동적으로 도망치다가 맥없이 그루누이에게 살해당하는 데, 영화에서는 약간의 스토리를 더했다.(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정략결혼 때문에 로라는 큰 불만을 가진다. 아버지의 명령에 반항하다가 뺨 맞는 씬도 추가되어 있다. 그루누이에게 살인당하기 직전 장면에선 뭔가 해석하기 어려운 오묘한 표정을 짓는다.)
원작에서 로라의 이버지는 너무 솔직한 심리 묘사 때문에 변태 같은 내면과 달리, 영화에선 딸바보 아빠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로라를 지켜야 한다는 입박김이 나중에 하나뿐인 딸의 죽음을 불러온다. 그는 나중에 그루누이를 고문하며 도대체 왜 자신에게서 사랑스러운 그녀, 로라를 빼앗았는지 묻는다. 돌아오는 대답은 ‘I just…needed her. (난 단지 그녀가 필요했어요.)‘. 그루누이의 비인간적이고 무심한 성격, 동시에 주인공에게 로라는 단지 향수의 재료였을 뿐이었다는 걸 이 장면에서 알 수 있다.
그루누이의 살해계획에 처음과 끝에 있던 두 소녀의 공통점은 노란색의 뭔가를 소지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소녀가 팔던 노란색 자두는 프랑스 로렌지방에서 맛이 달고 향이 좋은 미라벨 자두라고 한다. 로라가 쥔 노란 장미는 꽃명은 ’ 완벽한 성취‘다. 주관적인 판단으로는 노란색의 의미는 두 소녀가 똑같이 사람에게 은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매혹적인 체취를 가졌다는 뜻으로 본다. 그리고 노란 장미를 들고 등장했던 로라를 살해함으로써 그루누이는 ’ 완벽한 성취‘를 이룬 게 아닐까…라고 나름 추측하고 있다.
3. 적절한 각색: 주인공의 심리 표현
영화 내에서 총 13명을 살해한 그루누이(책에선 25명으로 나온다.)는 사형대에 올라가기 직전 소녀들의 아름다움 정수인 향수를 시험한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그 향수 한 방울 만으로, 경비병과 귀족들이 그에게 무릎을 꿇고 누더기 옷 대신 자기 옷을 빌려주었다. 그리고 무대의 주인공인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가 과장된 몸짓으로 사람들에게 인사하며 향을 멀리 흩뿌리자, 그의 사형을 구경하러 온 대중들은 향수에 취해 미치려고 한다.
그 뒤는…. 너무 유명한 장면이라 생략하겠다. 매우 선정적인 장면이라 브런치에 묘사하면 쫓겨날 것 같다.
한 단어로 표현하면 ‘아수라장’이 된 사형장 한가운데서, 그루누이는 ‘어라, 이게 아닌데…?’라는 표정을 지으며 얼굴이 점점 굳어간다. 그는 사람들이 본인 그 자체를 찬양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제조한 ‘향수’에만 취했다는 걸 금세 알아차린 것이다.
이때 그는 그라스로 향하다 외딴 동굴에 오랜 기간 칩거했던 과거처럼, 자신이 결코 인간무리에 낄 수 없음을 체감한다. 동시에 그녀는 본인이 처음 살해한 파리 뒷골목의 자두를 손질하던 붉은 머리 소녀를 떠올린다. 상상 속 소녀는 그루누이를 보더니 따뜻하고 상냥한 태도로 그를 꼭 안아준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처럼 말이다.
이런 애틋한 장면은 원작에 없다. 오히려 원작 내 향수로 신이 된 '위대한 그루누이'는 인간에 대한 증오심을 표출하고 싶어 한다. 원작을 읽을 때 처음부터 끝까지 증오와 분노의 감정만 확실한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에게 약간 거리감을 느꼈다. 하지만 영화 속 그루누이에겐 어쩐지 동정심이 생겼다. 비록 10여 명을 죽인 연쇄살인마지만, 사형장에서 따뜻한 손길을 상상하는 씬에서 왜 그가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수 있는 향을 갈망했는지 알 수 있었다.
자기의 필요로 살해한 로라의 아버지마저 ‘내 아들아!, 날 용서해 다오!’라며 무릎을 꿇는 순간, 그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며 절망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남들의 향을 훔쳐내서 그 누구보다도 멋진 가면을 만들었지만, 결국 사람들은 그 가면만 사랑할 뿐이다. 인간들에게 있어 향수가 없는 그루누이는 ‘존재감은 없지만 거림 찍한 괴물’ 일뿐이었다. 결국 그는 다시 고향인 파리로 돌아가 죽음을 선택한다.
간략하게 영화의 몇몇 장면들을 글을 쓰며 다시 보니, 역시 참 매력적인 작품이구나 싶다.
영화를 보면서 느낀 또 다른 디테일은 바로 대사! 몇 없지만 가끔씩 본인의 의사를 단호하게 드러내는 그루누이의 대사는 대체로 쉽고 간결한 구조로 이뤄져 있다.
I have to learn how to keep smell...(중략)...
I have to learn how to capture a scent and preserve it!
-그루누이가 붉은 머리 소녀의 향을 꿈꾸다 냅다 깨서 발디니를 붙잡고 뱉은 말.
영어잼병인 나도 그의 대사는 받아쓰기 쉬웠다. 아마 그가 제대로 된 언어 교육을 받지 못했음을 단순한 문장 구조로 나타내는 듯했다.
책, 영화, 오디오북 모두 다 한 번 이상 봤지만, 나중에도 그중 하나를 꼭 다시 집을 것이다.
아 참고로 이 영화는 우리나라 자막으로 정식 서비스하는 곳이 두 곳밖에 없다(게다가 웨이브 기준 자막이 조금 엉성하다.). 2022년 2월 기준 네이버와 웨이브에서 서비스 중이니 참고하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