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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말 Jan 05. 2023

아들의 일기

우리는 왜 일기 쓰기가 어려웠을까?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은 일기 쓰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책상에 앉아서는 연필을 쥐었다 놨다, 글을 썼다 지웠다, 엎드렸다 일어났다, 몸을 배배 꼬면서 괴로워한다. 저것은 일기를 쓰는 9살 어린이의 모습인가, 글감이 떠오르지 않아 괴로워하는 작가의 모습인가. 누군가 그랬다. 글을 쓰는 순간의 작가는 타자기일 뿐이라고. 그 순간에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 잘 정리된 생각을 페이지에 옮기는 작업을 할 뿐이라고. 아들은 일기장에 적을만큼 기억에 남는 일이 없는 걸까, 아니면 특별한 일기를 적고 싶은걸까. 그냥 하루 중, 즐거웠던 기억을 담담하게 적길 바라는 내 마음이 아들에게는 어려운 숙제인걸까?




 개구리 올챙이적 시절 생각 못한다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하자면 숙제를 안 해가면 학교에서 매를 맞았다. 그래서 방학이 3일 밖에 남지 않은 달력을 보면서 가슴이 철렁했던 기억이 난다. 만들기 숙제는 한 두시간이면 뚝딱 끝낼 수 있지만 일기쓰기는 가장 난이도가 높은 숙제였다. 내용은 제쳐놓고라도 날씨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애꿎은 부모님에게 이 날은 비가 왔는지, 이 날은 흐렸는지, 어서 빨리 날씨를 기억해내라고, 사는 게 바빠서 3일 전 날씨도 기억 못하는 엄마한테 대답을 재촉했던 기억이 난다. 내용은 당연히 쓸만한 게 없었다. 매일 동내 아이들과 뛰어노는거 말고는 기억나는 게 없었기 때문. 일상은 우리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서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썼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사는 할머니 집을 시골로 옮겨버리고 시골에 다녀왔다. 냇가에 가서 놀았고, 잠자리채로 사슴벌레도 잡았다. 사람 몸통만한 수박을 잘라먹었고, 계곡에 가서 다이빙도 했다. 내려오는 길에 뱀을 만나기도 했고, 옥상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감상하기도 했다. 


 현대판 일기 SNS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꾸미기는 필연적인 결과물이다. 보여주기 싫은 것은 감추고, 보여주고 싶은 것은 드러낸다. 그렇게 아이들은 선택적인 일상을 일기에 기록한다. SNS는 어른들의 일기다. 보여주기 싫은 것은 감추고, 보여주고 싶은 것은 드러낸다. 나의 특별한 일상(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의 순간을 기록하고 공유한다는 순기능도 있지만 나의 진(眞)일상을 부정하고 일탈을 쫓게 되는 부작용도 생기게 마련이다. 아무튼 순기능의 관점에서 우리 어른들은 이런 경험들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여기서 자유란 돈과 시간과 의지를 말한다. 하지만 아이들의 자유에는 허락이 필요하고 개입이 필요하다. 그것은 자유이지만 자유가 아니다.


 일기에는 특별한 경험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아직 세상이 어떤 즐거운 경험으로 가득한지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알려주는 것, 그리고 그것을 경험하게 해주는 것은 전적으로 부모에게 달렸다. 유투브에는 많은 간접 경험들이 있지만 유투브에서 본 내용을 일기에 적는 아이들은 없다는 점에서 볼 때 그것은 특별하지도 않고 경험보다는 단순한 정보에 가깝다.


 낚시를 시작한지 3년 정도 됐다. 작년에는 처음으로 아들과 같이 낚시를 가서 고기를 잡고, 직접 잡은 고기를 살려와서 집에서 회를 떠봤다. 나에게도 특별한 경험이었지만 아들에게도 특별한 경험이었나보다. 그 날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일기장을 한 바닥 가득 채웠다. 그 날 이후로는 회를 사달라고 하는게 아니라 회를 떠달라고 한다. 이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기에 적어서 기록으로 남기고 싶을 만큼 일상과는 동 떨어진 특별하고 특이한 기억. 그런 기억을 나는 아들에게 얼마나 만들어주면서 살아왔을까.


 8~90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녔던 분이라면 분명히 기억할 것이다. 산 속 깊은 곳에 있는 개울에서 도룡뇽 알과 올챙이를 잡아서 채집통에 담아왔던 기억. 학교마치고 문방구 앞에서 뽑기를 하던 기억. 집에 바로 가지 않고 오락실에 가서 친구들과 격투 게임을 하던 기억.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토요명화의 오프닝송. 일요일 아침 8시에 반드시 챙겨봤던 디즈니 만화동산. 만화가 끝나고 골목으로 뛰어나가면 약속이나 한듯이 우르르 달려나오는 아이들. 비석치기, 다망구, 얼음땡을 하면서 먼지구덩이에서 땀을 비오듯 흘리는 아이들. 밥 먹으러 들어오라는 엄마의 잔소리. 옷 꼬라지가 이게 뭐냐면서 먼지를 터는 엄마와 아프다고 소리 지르는 아들.


평일 오후 1시경, 아파트 베란다를 내려다보면 놀이터가 하나 보인다. 아이들이 신나게 소리지르는 소리가 들리고 길에는 노란 승합차들이 끊임없이 지나다닌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에는 짹짹하고 참새 우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상해서 다시 바깥을 내다보면 놀이터에는 아무도 없다. 러쉬아워가 지난 시간의 버스정류장을 보는 것 마냥 아이들이 떠난 놀이터는 을씨년스럽다. 방과후의 놀이터는 퇴근후의 정거장일까. 학원 버스를 기다리며 대기하는 장소. 아이들은 각자 정해진 시간에 있어야할 곳으로 이동한다. 아이들은 언제 스스로 특별한 경험을 만들 수 있을까?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어떤 부모는 자식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면서도 자신이 부족하다 생각하고, 어떤 부모는 아이들에게 생존에 관계된 관심 정도만 보이면서도 나 정도면 아이들에게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비교의 기준이 내가 부모님에게 받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큰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는 자라서 자신의 부족함과 부모님의 감사함을 알게 되고 무관심을 받고 자란 아이는 자라서 아이들에게는 감사를 요구하고 부모님을 부족하다며 무시한다. 아이들의 입을 통해 듣는 나의 모습은 내 생각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드라마 디마프(디어 마이 프렌드)에서 김석균(신구)이 박완(고현정)에게 한 말처럼 내가 모르는 잘못은 셀 수가 없으니 우리가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만 우리는 아이들이 사춘기를 겪고 성인이 되기 전에 이런 착각들을 걷어내고 나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최소한 아이들이 일기를 쓰는 동안이라도 우리는 그 일기장이 부모의 관심과 사랑으로 가득 채워질 수 있도록 해야한다. 아이들의 일기장은 부모가 쓰는 거라고 생각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형태이건,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이건, 아이들이 써내려 간 이 일기장의 내용에 따라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형성된다. 아이들의 일기장에는 내가 어떤 부모인지 알 수 있는 단서가 들어있다.



일기는 매일 다른 내용이어야 한다


 우리 삶은 매일 비슷한 패턴의 반복이다. 그런데 유독 일기 만큼은 매일 다른 내용으로 특별하게 채우고 싶어한다. 생각은 읽히지 않지만 글은 읽히기 때문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꾸미지 않지만 눈에 보이는 것은 꾸미려는 본능 때문이다. 그럼 아이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만들어주자. 그런데 나도 내가 아는 수준을 벗어나는 경험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 글의 댓글로 아이들이 일기에 적고 싶을 만큼 특별했던 경험에 대해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를 남겨보려고 한다.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님들도 아이들과의 소중했던 추억을 하나씩 남겨주세요. 서로가 서로의 메타인지력을 높여줄 수 있는 공동메타인지커뮤니티, 즉 소통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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