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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희 Dec 23. 2020

타인의 고통

오늘은 참다 참다 엉엉 울어버렸다. 병원에 가기 전에도, 입원해서도, 수술실로 누워 들어갈 때도 다소 긴장은 했으나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는데 오늘은 설움이 복받쳐 눈물을 쏟고 말았다.


날이 갈수록 다리 통증이 심해진다. 발이 저린 정도를 넘어서 드라이아이스 속에 하루 종일 발을 담그고 있는 듯하기도 하고 칼로 계속 베는 듯하기도 한 통증이 느껴진다. 발의 저림에서 시작된 통증이 이제는 타고 올라와 바깥 종아리까지 뻐근하기 시작했고 오늘은 종아리 역시 발처럼 칼에 베이는 듯한 애리는 느낌이 들었다. 거기에 엉덩이 근육이 욱신욱신 쑤시기까지 했다. 상황이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퇴원할 때 두 종류의 약을 받았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부작용을 설명하시고는 부작용 증상이 있으면 먹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그중 한 약은 구토 증상을 동반했고 투약을 중지했다. 한 종류의 약만 계속 먹고 있는데 차도는커녕 더 나빠지는 것 같으니 남편은 다른 약을 먹어보라고 자꾸 권했다.


“나 그거 먹고 하루 종일 구토 증상에 어지럽고 힘들었어,”

“그래도 다른 약이라도 먹어봐야 낫지 않을까.”


여기서부터 나의 서러움은 시작되었던 것 같다. 약물 부작용을 감당하면서까지 약을 먹어 다리 통증의 경과를 보자는 그 말, 나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없어 보였다. 물론 다리가 아프다니까 뭐라도 해보자는 의도로 한 말이겠지만 괴롭고 힘들게 뻔한 약을 먹으란 말이 야속하게만 들렸다. 그래서 다리 아프단 소리를 꾹꾹 속으로만 담았다. 사실 하루 종일 칼로 사과껍질 벗기듯 다리를 벗겨내는 기분이라 많이 힘든데, 안 힘든 척 살살 걸어 다니기도 하며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다가도 아픈 티를 내면 남편은 병원에 전화해서 따지라고 했다. 조직검사 결과는 다음 주에 나오고 진료도 다음 주에 잡아놓았는데 지금 전화를 건다고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프다고 하면 어쩌냐는 속 쓰린 대답이 들려왔다. 내가 약을 먹지 않고 병원에 뭔가를 요구하지 않아 아픈 것 같이 느껴져 죄책감이 들었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에게 신경이 다친 것 같아 많이 아프고 힘들다고 토로했다. 아무 말 없으면 아무 일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마냥 행복하게 쉬고 있는 줄 알 것 같아서 아프다는 것을 표현했다. 그 말에 수술 잘됐다면서 왜 아프냐는 말, 나도 다리 저려봤다는 말, 금방 나아질 거란 말,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말 등이 오고 갔다. 그 말에 “너희는 뼈를 뚫어 태워봤니?”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다 들어갔다. 왜 남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단정 짓고, 아프지 않아도 되는데 혹은 내가 무엇을 하나 빼먹어서 아프게 만들었냐는 듯이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내가 그 순간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바로 이 말이었다.

많이 힘들지? 참아내느라 고생이 많다.”

그저 나는 공감의 말 한마디만 들어도 큰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힘들지만 잘 참아내고 있다는 그 용기의 말.


환자는 희망의 아이콘이 아니다.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알겠지만 고통에 허덕일 때는 막연한 희망의 말들에 웃으며 답을 하기도 힘이 든다. 울고 싶을 땐 언제든 나한테 와서 울어도 된다, 아프면 언제든 전화해도 된다는 말 같은 위로는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중증 병을 얻고 기적처럼 살아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하는 의무를 가진 것처럼 잘 될 거란 주문을 외우며 살았다. 그런데 오늘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사실은 불안과 통증에 잠도 못 자면서 ‘괜찮아요, 별일 아니에요’와 같은 마음에 없는 위로를 남들에게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사실은 겁나게 아파 잠을 못 잡니다. 나같이 고생하기 싫으면 건강하십시오.”같은 말을 건네도 모두 불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늘 위로와 희망적인 메시지에 웃어야 하는 사람이 아닌데, 스스로 그 틀에 갇혀버린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아프단 소리와 힘들어 죽겠단 소리로 일기를 쓰며 엉엉 울어본다. 극히 소심해서 어디서 이런 말을 크게 꺼내지도 못하는 나는 글자로 마음을 표현해야 조금은 살 것 같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은 온전히 와 닿지 못한다. 나 역시 그러할 테니 나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해달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플 수도 있고, 괴로움에 울 수도 있고, 결론이 핑크빛으로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고, 가끔은 절망에 빠지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그런 나를 그대로 보아 달라는 말을 하고 싶다.

“오늘은 울고 싶은 모양이구나, 오늘은 많이 아픈 모양이구나, 내가 그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어 해 줄 말이 이것뿐이 없네. 힘내자.”

나를 그대로 받아들여 인정해주는 말, 그게 때론 엄청난 위로가 된다. 오늘은 바로 그 위로가 필요한 날이었다. 오늘은 죄책감없이 자유롭게 아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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