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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 서연 Jul 08. 2024

영원한 아웃사이더

영화 <화이트 크로우>

시간을 품은 옛날 발레 영상물들을 찾아서 보는 것은 고전 음악에서 위대한 연주자들이 남긴 인류의 문화유산을 듣는 것과 같다. 특히 위대한 무용수들이 '춤'이라는 몸짓에 자신을 내던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시공간을 넘어서서 시대를 초월한 공감으로 연결된다. 때로는 오래된 화질을 뚫고 나올 정도의 강한 설득력에 가슴 저린 여운이 남는 잊지 못할 경험도 하게 된다. 유튜브에서 마르고 닳도록 본 옛날 발레 스타들 중에서 루돌프 누레예프가 내게 그런 여운을 남기는 무용수이다.

루돌프 누레예프


한시대를 풍미했던 발레리노 루돌프 누레예프. 예술가로서의 자유의지가 강했던 그는 결국 자신의 춤 이야기를 하기 위해 서방으로 정치적 망명을 선택했다. 하지만 영화 <화이트 크로우>에서 망명을 선택한 순간 취재차 몰려든 기자들에게 "여러분 나라에서도 행복하진 않겠죠."라고 했던 말처럼 어쩌면 평생 뼈에 사무친 그리움과 고독감을 꼭꼭 눌러 마음 한 켠에 쌓아두었을지도 모른다.


기차에서 태어난 누레예프는 영화 속에서 기차에 집착한다. 키로프 단원으로써 서방국가로 순회공연을 하러 프랑스에 온 누레예프가 예술적 갈망과 허기를 채우기 위해 미술관 관람을 하거나 장난감 가게에 가서 기차를 사는 모습들은 무용수로서의 현재 모습에서 발레리노가 되기 위해 훈련을 받았던 과정이나 어린 시절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된다. 스승 알렉산드르 푸슈킨이 '신체적인 테크닉도 중요하지만 춤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에 대해 던진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마른 빵을 먹으면서 미술관이 개관하기를 기다렸다가 관람 시간이 되자마자 뭔가린 것처럼 감상한 그림은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 실화를 바탕으로 그려진 이 그림은 추한 것에서도 美를 발견하고 예술적인 표현으로 아름다움이 된 작품으로 실제 생존자들의 극적인 탈출은 이후 누레예프가 가슴에 품은 강렬한 에너지와 예술가로서의 정신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극적인 망명을 하게 되는 것을 상징하는 오브제로 나온다. 또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아는 이내 누레예프의 어린 시절과 오버랩되면서 오랜만에 돌아온 아버지가 어린 누레예프를 안아주는 흑백의 장면으로 연결된다.

https://youtu.be/prgwBjUC7Go?si=kU6LcdyR2CRT1w71



이슬람계의 타타르인 부모 사이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 안에서 태어난 누레예프는 소련에서도 정착할 곳이 없는 외톨이었다. 아버지는 전쟁에 나가 싸웠고, 어머니는 없는 살림에 아이들을 키우느라 늘 고군분투했다. 지독스러운 가난 속에서도 어머니는 누레예프에게 무용을 가르쳤다. 이내 천부적 소질이 발견되어 레닌그라드의 바가노바 발레 아카데미에 보내졌지만 그의 왕성한 호기심과 천성적인 반항심은 끊임없이 학교를 비롯한 당국과 마찰을 빚었다. 지적 호기심이 많았던 누레예프는 틈틈이 영어수업을 받으면서 영어실력을 쌓았고, 서방의 발레 무용수들에 관한 서적과 비디오 테잎을 보았다. 특히 누레예프는 덴마크 출신의 걸출한 발레리노 에릭 브룬의 춤을 보면서 테크닉을 분석했다. 누레예프는 브룬의 1960년 공연을 직관하고 싶어했지만 당국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동독에서 버스를 타고 다니며 살인적인 발레 스케줄을 소화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이후 서방으로 망명하고 나서 이 둘은 실제로 만났고 이내 사랑에 빠졌다. 디아길레프 & 니진스키, 모리스 베자르 & 조르주 동처럼 발레의 역사를 바꾼 동성 커플은 아니었지만 누레예프 & 에릭 브룬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발레리노들이다.)

루돌프 누레예프와 에릭 브룬
에릭 브룬은 덴마크 출신의 발레리노로 타 유럽국가, 미국에까지 진출. 덴마크 스타일 외에도 다양한 발레 테크닉을 익히면서 보수적이었던 덴마크 발레를 변화시켰다.


키로프가 파리에서 공연하도록 초청받았을 때에도 품행불량으로 낙인찍힌 누레예프는 당국의 허락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러나 레닌그라드에서 이미 누레예프의 춤을 봤었던 프랑스 측 진행자들이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소련 당국은 어쩔 수 없이 누레예프의 프랑스 공연을 허락했다. 누레예프는 프랑스 측 진행자들의 예상대로 무대를 휩쓸었고, 특유의 매력과 카리스마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스타가 되었다. 게다가 능숙한 영어 실력 덕분에 프랑스 무용수들과 대화하지 말라는 당국의 규칙을 어기고 매일같이 어울리며 파티를 즐겼다. 무대를 장악하는 카리스마와 빼어난 춤실력으로 프랑스에서 니진스키 상까지 받은 누레예프였지만 그를 감시하는 소련 요원들의 눈에는 누레예프가 눈엣가시처럼 보였다. 천성적으로 호기심이 많고 자유분방했던 누레예프는 소련 요원들의 감시 따위는 신경쓰지 않았고, 오히려 새로운 것은 모두 다 체험해보려고 기를 썼다.


결국 소련 당국은 파리 공연에 이어 예정되어 있던 런던 공연에서 누레예프를 빼고 본국으로 소환하려고 했다. 하지만 누레예프는 이미 본국으로 소환된 무용수가 가혹한 처벌을 받았던 선례가 있었음을 잘 알았기에 프랑스 친구들과 헤어지기를 강하게 거부했다. 이에 프랑스 안무가 피에르 라코트는 파리 사교계의 여성 클라라 생에게 전화를 해 도움을 요청한다. 프랑스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의 아들과 약혼녀이기도 했던 그녀는 누레예프가 프랑스 공연을 하면서 쌓아온 친분으로 그의 망명을 돕는다. 자신이 뱅상 말로의 약혼녀라고 말하자 프랑스 공항 경찰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이는데, 그 전까지 초조해하는 누레예프의 모습과 소련 요원들을 따돌리며 프랑스측으로 가 망명을 선언하는 긴박한 순간들은 이 영화에서 최고조로 긴장감을 자아내는 장면들이다.

https://youtu.be/_mXo0LQ6pi0?si=im5GbK9kWVUxECYm



누레예프는 망명을 결심하는 순간에 어머니 손을 잡고 발레를 배우러 발레 학교에 처음 갔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잠을 자다가 어머니가 일하러 나가는 인기척에 눈을 떠서 한참 동안 창 밖을 내다볼 정도로 어머니에 대한 애착이 강했던 누레예프는 비록 발레 학교까지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갈 수 있었지만 교실 안에는 혼자 들어가야만 했다. 흑백의 기억 속에서 어린 누레예프는 무용실에 들어선 순간부터 사랑하는 애착 대상과 분리되어 홀로 서야만 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서 빠져나온 누레예프는 이제 망명을 선택한 순간부터 새롭게 홀로 서야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https://youtu.be/moMCxS8naoU?si=OHPQ5eiMXAzT61dz



영화 속에서 누레예프는 춤추기 직전에 늘 어머니를 떠올린다. 그리고나서 무대 위로 날아올라 힘차게 도약을 하곤 했다. 누레예프와 똑닮아 누레예프 역을 맡았던 실제 발레 무용수 올레그 이벤코가 영화 속에서 몸부림치듯 힘차게 날아오르는 모습들은 예술가로서의 갈망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뒤엉킨 감정들을 춤으로 풀어낸 누레예프의 실제 모습들을 연상시킨다.


타타르인이라는 출신부터 너무나 톡톡 튀고 천재적인 재능 때문에 고국에서도 어디에 속하지 못했던 누레예프는 예술가의 자유 의지와 자신이 들려주고 싶은 발레 이야기 때문에 망명을 선택했지만 망명 후에도 어머니, 가족,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함을 가슴 한 켠에 눌러담아야만 했던 겉으로는 부와 명예를 거머쥔 화려한 예술가가 되었어도 내면 깊숙한 곳에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고독한 인생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화 속에서 누레예프가 기차에 그토록 집착했던 이유는 어쩌면 고향에 대한 그리움, 향수였는지도 모른다.


영화 속에서 무용수로서 이야기가 없으면 춤 출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누레예프는 자신이 춤을 춰야 하는 이유를 찾아간다. 테크닉은 춤을 추기 위한 수단이지만 목표가 될 수 없기에 다방면으로 예술적인 지평을 넓혀가며 자신이 춤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를 고뇌한다. 결국 춤을 추는 이유를 깨달으면서 목적을 위해 망명을 선택한 누레예프는 이후 유럽에서 자신이 들려주고 싶었던, 전파하고 싶었던 러시아 발레 이야기를 하면서 발레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다. 누레예프는 망명 이후 로열발레단에서 각 작품마다 영국의 국민 발레리나 마고 폰테인과 발레 커플이 되었고, 누레예프의 야생마같은 매력이 폰테인의 우아하고 섬세한 매력과 대비가 되면서 영국의 발레팬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몰아넣었다. 또 생애 후반기에는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예술 감독으로 재직하면서 고전 발레의 대부분의 작품들을 재안무하거나 창작하는 등 에이즈로 사망하기 전까지 평생 발레에 몸 담으면서 자신의 발레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마고 폰테인과 루돌프 누레예프
거의 스무살 정도 차이 났지만 나이 차이는 두 분이 빚어내는 앙상블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폰테인은 은퇴하려고 했다. 그러던 중 젊은 누레예프가 톡 튀어나와 그녀의 인생 앞에 나타난 순간 폰테인은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누레예프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영화 속에서 누레예프는 고국에 돌아갈 일이 없다고 했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받았을 때 잠시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예술가로서의 자유를 찾아 망명을 한 그였지만 어쩐지 그의 춤에는 심연에 켜켜이 쌓아둔 슬픔과 고독이 폭팔적인 열정과 뒤엉켜 감상자로 하여금 눈시울을 붉어지게 하면서 가슴 저리게 하는 그 무언가가 있다.


https://youtu.be/c0Gy0GXP2Ug?si=x-O9wYEs-HqcUvSv


https://youtu.be/AjkmX21VYeU?si=SiUBMOeB6z9XWF2W

페트루슈카 역의 누레예프. 담담하게 슬픈 표정을 짓는 고독한 페트루슈카 역에 자신 모습을 투영시켰던 것은 아니었을까.



영화는 <화이트 크로우>

참고문헌은 <아폴로의 천사들 : 발레의 역사, 제니퍼 호먼스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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