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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혼들의비행 Apr 19. 2023

[공간 1] 공간으로 와! 우린 비비야!

비혼들의비행_비혼여성공동체 비비로 살아가기

[2003년 비혼모임을 시작하여 자기 자신으로 잘살아오는 동안, 이 사회에서 안전한 둘레가 되고 버팀목이 되어준 비혼여성공동체 '비비'가 있었다. 나는 비비의 한 개인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우리는 쌓아온 신뢰를 안고 어떻게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고 있는지, 개인과 공동체가 어떻게 조화롭게 지속할 수 있는지, 지난 20여 년간의 비혼생활과 공동체적 삶을 돌아보고자 한다. 비혼, 공부, 여행, 독립, 공간, 소설, 돌봄, 공동체, 글쓰기 등 주제를 잡아 한 주제당 3~4편 글을 쓸 계획이다.]



1억 생기면 뭐 할 거야?

그때는 큰돈이었다.

내 집 말고, 우리가 함께 뭐든 나눌 수 있는 공간 생기면 좋지.

1억은 필요 없었다. 

‘비비’의 변화를 위한 합의면 충분했다.

너희 너무 빨리 시작하는 거 아니니?

혼자서 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걱정인가.

그런데, 거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나는 17년 동안 마우스만 잡았는데.

커피만 팔든가, 프로그램만 하든가, 하나만 해. 선배들 조언은 야멸찼다.

아, 낯가리는 내가 무슨 프로그램을 한단 말인가.

커피는 팔지 않고, 그냥 드리기로 했다. 다행이다.

내 인생에 모처럼 큰 변화였다.

희망과 두려움이 한데 몰아쳤다.  


        

[공간 1] #. 공간으로 와우린 비비야!     


시모임을 하던 경원동 홍지서림 골목 ‘필하모니’, 영화모임을 하던 고사동 극장가 골목 ‘옴므’는 사라졌다. 시모임도, 영화모임도 사라졌다. 모임이 먼저 끝났는지, 커피숍이 먼저 없어졌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후 비혼모임을 하러 쏘다녔다. 처음에는 ‘마을’ 사무실에서, ‘비비’가 독자적 모임으로 독립한 후에는 나의 일곱 번째 전셋집에서, 비비 구성원들이 아파트로 독립한 이후에는 마을 집에서 모였다.

      

비비는 일곱 번째 생일을 맞아 풍남동 어느 아트센터를 대관했다. 비비에게 격려와 지지를 보내준 지인들과 함께 축하 자리를 마련하고, 공식적 모임임을 알리고자 했다. 담당자에게 행사 내용을 설명하고, 2층 홀을 예약했다. 1층에는 센터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푸른산’은 삼색주먹밥, 야채말이초밥, 연근과일샐러드, 궁중떡잡채, 닭강정 등 깔끔한 파티 분위기로 손님맞이 상차림을 연출했다. 비비가 여행 가서 찍은 수많은 사진 중 해마다 최고의 사진 한 장씩, 일곱 장을 골라 입구에 전시했다. 영화 ‘비혼비행’을 상영하고, 비비 엄마들의 생애 구술사 Prolog 작업을 발표하고, 비비3기 ‘비요나’가 축하공연을 했다. 나는 간만에 정장을 차려입고 마이크를 부여잡고 비비가 걸어온 길을 낭독했다.   

  

시끌벅적, 독특한 파티에 놀란 관장의 깜짝 출연으로 중단 상황이 벌어졌다. 닭강정까지 풀었다면, 그 장소에서 좀 더 일찍 쫓겨날 뻔했네. 우리는 서둘러 행사를 마쳤다. 소모임들이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공간, 고급문화가 아닌 생활문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없네. 빨리 우리 공간을 가져야겠다는 평가를 나눴다. 그런데, 담당자 말이야, 관장한테 깨지는 거 아냐, 걱정이네. 우리는 관장 스타일이 아닌 걸로 하자. 비비는 사적 공간이 아닌 환대로 물든 공유 공간을 상상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좀 그렇지. 나는 친구를 10년 넘게 만나고, 한 직장도 10년 넘게 다녔지. 뭘 하나 하면 오래 하는 것이 나한테 잘 맞나 봐. 지금도 고향을 떠나 전주에서 30년 넘게 살고 있거든. 그런데 매 순간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나는 스스로 못 견뎌. 많이 말고, 아주 조금씩, 천천히, 차곡차곡 달라지고 싶지. 안전하게. 자유롭게. 그게 가능할까? 나는 변화무쌍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다. 나에게 ‘변화’란 멀리서 보면 보이지 않고, 가까이서 마음을 기울여 보아야 보이는, 외형의 변화보다는 큰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는 자잘한 차이 같은 것이었다. 그 ‘차이’에 의미를 붙여 골똘해지는 것이 즐거웠다. 이를테면, 시리즈 책 표지, 같은 디자인의 ‘다른’ 컬러를 탐색하는 것. 같은 모양의 잎 크기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정서 같은 것. 

    

나의 비혼이 지속되고 있었다. 비비와 함께. 모임 비비가 사라지지 않고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혹여 그 상황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있더라도 변화에 응답했기 때문이다. 2010년 비비는 사랑방 같은 ‘여성생활문화공간비비’를 만들고, 더 다양한 비혼여성들과 마을회관 같은 ‘협동조합’ 법인체를 이루고, 이 모든 것을 자력으로 만들고 유지해왔다.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을 실현한 전환점이었다. 나는 안전한 관계만큼 안전한 공간을 원했다. ‘비혼여성’이라는 ‘같은’ 카테고리면 충분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장소는 비혼을 외칠 광장이 아니라 생활을 돌보고 우정을 나누며, 그들과 연결할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시월의 마지막 밤에 시를 읽고, 소설읽기 모임을 진행하고, 요가를 배우고, 공동체상영으로 영화를 보고, 주말에는 친구들과 걷기 여행을 갔다. 이제 문화에 목마른 하이에나처럼 시내로 돌아다닐 일은 없어졌다. 나는 삼천동에 안착했다. 

    

그런데, 비혼여성들은 많이 오지 않았다. 예상치 않은 기혼여성들과의 만남이 활기를 불러왔다. 꼬리에 꼬리를 문 비혼여성들이 간헐적으로 왔다. 알음알음이 아니고서는 낯선 이가 큰 글씨로 ‘비비’, 작은 글씨로 ‘여성생활문화공간’이라고 적힌 간판을 보고 2층 철문을 열기는 쉽지 않았다. 지나가다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이들이 올라왔다. 여기는 뭐 하는 곳이에요? 우리는 한참 설명하고, 그들이 다시 공간을 찾는 경우는 드물었다. 나중에 임대인이 말했다. 처음에는 무슨 종교모임인 줄 알았다고. 가끔 인터뷰를 요청하는 기자, 논문 쓰는 대학원생, 비혼여성공동체에 관심 있는 이들이 타지에서 찾아왔다. 전주에 사는 비혼여성들은 쉽사리 나타나지 않았다. 어디 있는 거지?

     

우리는 적극적으로 비혼여성을 불러 모았다. 비혼객잔非婚客棧을 통해 비혼 담론의 장을 마련하고, 비혼인터뷰를 통해 좀 더 다양하고, 좀 더 많은 비혼 동료들을 만나고자 했다. 16평 작은 공간에서 테이블을 한쪽으로 옮겨 쌓고 요가를 했다. 책장 뒤에 마련한 구석에서 컴퓨터 작업을 하다가 뒤로 돌아 밥솥에 쌀을 안치고, 책상 위를 치워 점심을 먹었다. 퇴근하고 소모임을 하러 비혼여성들이 왔다. 나쁘지 않았다. 내가 이러려고 직장을 그만뒀나, 같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5년이 되어갈 즈음, 이대로 괜찮은가? 이대로 공간 운영을 지속할 수 있을까? 우리가 책정한 월급은 오를 수 있을까. 이대로 비등록단체로서 정체성과 공공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여전히 거기는 뭐 하는 곳이냐고 물어온다. 이곳이 비혼여성들이 연결될 수 있는 공간으로 효용성이 있는가? 익명의 비혼은 언제 나타날까. 변화의 한걸음이 필요했다. 

    

형식이 필요했다. 1인 1표 의사결정, ‘협동조합’ 법인을 선택했다. 설립 전 교육을 받았다. 당신이 생각하는 형태는 이미 다 세상에 있을 것이다. 강사는 말했지만, 협동조합 유형에서 우리가 들어갈 만한 적합한 카테고리를 찾지 못했다. 결국 ‘다중이해관계협동조합’으로 결정했다. 2016년 1월, 법인을 등록했다. ‘협동조합’까지 붙어서 이름이 열네 글자가 되었다. 연대를 위해 기명할 때 정신 차리고 적었다. 2월, 공간비비 5년을 정리하는 『비혼들의 비행』 발간회를 열었다. 삼천동 주민으로서 당당하게 삼천문화의집 상상카페를 대관했다. 책에는 비혼여성 인터뷰와 비혼객잔 녹취를 풀어 실었다. 의의로 기혼여성들이 밤새 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5월, 약 50평 공간으로 확장 이전했다. 세 배 더 넓은 곳으로, 월세는 다섯 배나 더 많은 곳으로 이사 간다고 했을 때, 돈을, 많이 벌었어? 그럴 리가요. 이제부터 벌어보려고요. 영리怜悧하지 않은 우리는 협동조합이 營利 법인임을 잊지 않았다. 50:1 축소판 공간을 세 곳으로 나누고 도면을 그렸다. 개별 화장실도 있다. 책상을 쌓지 않고도 요가와 강좌를 할 수 있는 넓은 교육실이 생겼다. 그곳에서 11월, ‘여성을 사유하자!’ 코너로 김현경 저자를 모시고 ‘사람, 장소, 환대’ 특강을 열었다. 공간비비의 문을 활짝 열며 이곳이 비혼여성들에게 환대의 공간이 되기를 바랐다. 

    

내용에도 변화가 필요했다. 협동조합 초기 발기인은 비비 구성원으로 정했다. 모임에서 만장일치 의사결정을 해 온 터라 1인 1표 의사결정의 미덕으로 운영을 염려하지 않았다. 공간비비가 우리끼리만의 내용으로 고착되는 것을 염려했다. 새로운 사고가 필요했다. 비혼여성 5명을 조합원으로 증원했다. 그들과 함께 11월, ‘비혼여성아카데미’를 기획했다. 한번에 이렇게 많은 비혼여성을 한곳에서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이듬해 여성주의 배움터 ‘페미야학’을 열었다. 

     

비비의 구성원이 아니라, 비비의 의미가 확장되었다. '비혼들의비행'의 비비도 비비, 해체한 비비2기, 비비3기도 비비, 공간비비도 비비, 아파트 주민 단톡방도 비비로 인식되었다. 저기요, 정확하게 ‘같은’ 비비는 아니고요, 그 자세한 ‘차이’를 설명하다가, 그게 그거 아니에요? 맞다. 그게 그거다. ‘비비’는 같다가 다르다가를 변주했다. 2022년 여성주거공동체를 위해 별도로 설립한 ‘비비 사회적협동조합’은 모두 다 빼고, 이미 명사가 되어버린 ‘비비’만을 넣어 단체명을 지었다. 2023년 페미야학 주제로 ‘다시, 비혼’을 고민하다가 나는 이런 문장을 얻었다. 나는 비혼 선언은 아니어도 ‘비비 선언’은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아, ‘사이보그 선언’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가족이나 반려라는 규정보다는 생활공동체로서의, 공생자로서의 비비를 선언할 수 있지 않을까.     


확장 이전한 공간, 내 자리에서 저 멀리 계단을 올라오는 이의 모습이 보인다. 코너를 돌면 투명한 유리문 너머 어떤 이가 올라온다. 나는 모니터 앞 내내 잡고 있던 마우스를 놓는다.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나는 수줍고, 예의 바르게 자리를 내어주고, 커피 드릴까요? 드립커피를 내려 맞은편 자리에 앉는다. 수많은 층위의 비혼 스펙트럼 속에서 이렇게 다양한 비혼여성을 맞이하게 될 줄 몰랐다. 나하고는 결이 다르네, 속말을 삼킨다. 방문객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들이 왔다가 간다. 갔다가 온다. 어떤 날은 온 우주의 인력이 작동하듯 결이 비슷한 이를 만난다. 두 번 건너면 다 아는 이 좁은 전주 바닥이지만, 우리는 건너지 않고도 이런 우연을 겪는다. 너도 아는 사람이야? 나도 옛날에 만났었잖아. 서로의 결이 같든 다르든 비혼여성에게 이곳이 우정의 공간이길 바랄 뿐. 그런데, 나는 어떻게 이 공간에서 ‘나’가 아닌 ‘타자’를 생각하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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