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들의비행_비혼여성공동체 비비로 살아가기
6개월이 넘어갈 거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다. 6개월이 6년이 되고, 시간이 다시 그만큼 흐르고, 통장 잔액이 많지 않아도 난 지금 덜 불행할 줄이야.
나는 2010년 2월 입춘날 생애 첫 22평 임대아파트로 이사했다. 비비 구성원 중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해 2월 비비는 시내 문화공간을 빌려 7주년 생일잔치를 열었다. 나는 앞으로 쓸 6개월 예비비를 통장에 마련해놓고, 3월에 긴 정규직을 퇴사했다. 비비는 1년 전부터 ‘비혼들의비행 공동체 논의를 위한 워크숍’을 통해 비혼여성들의 허브 공간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마을’과 ‘주얼’, 그리고 내가 상근을 결정했다. 4월, 사무실을 알아보러 다녔다. 아파트에서 도보 10분 거리 위치한 16평 작은 공간을 구했다. 나는 전세금을 투척했다. 비비 구성원은 기백만 원씩을 내놓았다. 비비 회비로 모아놓은 공동자금을 공간 운영으로 쓰는 데 동의했다. 그렇게 모인 돈이 얼마간 상근자의 급여가 되었다.
우리는 그곳을 ‘여성생활문화공간비비’라고 이름을 지었다. 여성들의 생활과 문화를 영위할 수 있는 공간, 비비, 멋지지 않나. 6월 15일, 마을은 아파트에 있는 책 일부를 공간으로 옮겼다. 주얼은 부항기를, 나는 커피잔 세트를 들고 왔다. 우리는 그날을 공간비비 시작의 날이라 정하고, 유선전화번호 뒷자리를 ‘0615’로 요청했다. 615공동선언도 아니고, 실없는 농담을 던지면서 뭔가 선언은 한 것 같았다. 우린 공간을 만들었어! 그렇게 공간비비로 시시각각 나가기 시작했다.
몇 달 동안은 그즈음 퇴사한 주얼과 실업급여를 받으러 다녔다. 노동 없이 급여를 받다니 그건 내가 상상해본 미래가 아니었다. 내 인생에 근로가 없던 때가 있었나. 졸업하고 일을 구하기까지 방황의 나날, 화상 사고로 입원한 엄마를 돌보기 위해 괴로웠던 직장을 그만두고 뛰어든 간병 생활, 나의 경력을 키우면서 제때 월급이 나오는 직장을 들어가기 전까지, 들어갔다가 나왔다가 차마 이력서에는 적을 수 없는, 수많은 일터를 옮기던 사이사이 나날들을 제외하고 근로가 없던 때는 없었다.
전 직장에 입사하여 3년마다 승진했다. 10년이 지나고부터는 비혼여성 팀장에게 더는 승진할 직책이 없었다. 그래도 오늘 하루를 보내고 내일 하루를 꾹 참고 보내면, 그래 출근하고 퇴근하면 작년보다 많은 월급이 나오는 나인투식스 직장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은 데에는 비비의 향후 계획이 일조했다. 당시 경력직 신문편집디자이너는 퇴사 후 1인 창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내가 1인 창업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일찍 알았다. 나는 조직 생활 체질이라고 떠들었다. 더는 다닐 이유가 없어질 만큼 충분히 일했다. 5년 동안 고민하고 ‘이과장’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나 돈을 더 벌려면 거기에 더 있어야 했다.
공간비비에서 상근을 결정한 셋은 이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것이 나름 돈 벌 궁리라면 궁리였다. 마을은 타로강좌를 열었고, 주얼은 요가반을 만들었고, 나는 소설읽기 모임을 꾸렸다. 그것이 많은 수입을 가져오지 않았다. 둘은 외부 강의를 나갔다. 나는 어디선가 나타날 비혼여성을 기다리며 그들이 벌어온 돈을 장부에 곱게 적는 총무를 맡았다. 5년간 월 정산이 맞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적은 수입에서 적금을 부을 때 짜릿했다. 이후 법인을 등록하면서 총무가 할 수 없는 회계를 주얼에게 넘겼다.
적막강산 공간을 지키며 날마다 홈페이지에 사소한 내용의 새 글을 올렸다. 이를테면 ‘공간비비 1호 회원이 탄생했어요.’ ‘비혼유랑단이 서울에서 찾아왔어요.’ ‘비혼PT나이트를 갔다 왔어요.’ ‘녹색살림이스트 강좌를 시작했어요.’ ‘비비의 열한 번째 생일이 돌아왔어요. 내년에는 공간비비 5주년을 기약해보아요.’ 협동조합 법인을 등록하기까지 약 5년간 월 200만 원을 넘지 않는 장부를 적으며 셋은 대체로 웃었다. 한데 모은 수입에서 월 임대료와 운영비를 빼고 나면 한 사람 최저임금 정도가 남았다. 사이좋게 셋으로 나눠 각자 개인 통장에 입금했다. 수입이 거의 없을 때는 비비 공금을 가져다가 썼다. 비비 회계와 공간비비 회계가 뒤섞이지 않은 채로 유동했다. 이의를 제기하는 구성원은 없었다. 갚은 적은 많지 않았다.
여성단체에서 일한 마을과 주얼은 보조금 사업의 생리를 잘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자생해보기로 했다. 쉽지 않았다. 나는 착실하게 모아놓은 적금을 조용히 하나씩 깨기 시작했다. 그리고 만 원이라도 급여가 오르기를 외쳤다. 적은 급여보다 오르지 않는 급여가 나는 힘들었다. 오늘은 고용인 입장에서 고민하고, 내일은 피고용인 입장에서 요구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이것이 경제공동체의 쓴맛인가.
실업급여가 끝나고, 나의 6개월 예비비는 그다음 6개월을 예전과 다르지 않게 살게 했다. 정규직 급여가 나오지 않을 거라는 나의 마지노선 6개월이 6년이 되고, 다시 시간이 그만큼 흐르고, 통장 잔액이 많지 않아도 지금 덜 불행하기 위해서는 경제활동과 소비생활의 전환이 필요했다.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하기 위해 목돈을 마련할 이유는 없어졌다. 적금은 2년마다 재계약 시 오르는 임대아파트 보증금 인상액 마련이 전부다. 월 임대료를 줄이기 위해 전환보증금을 최대치로 넣었다. 개인 건강보험 납입액은 최소한으로 줄였다. 부모님 용돈과 형제 회비는 반으로 줄였다. 비비 회비는 공간비비를 만들면서 모두가 반으로 줄여 내기로 했다. 내 코가 석 자라 후원금도 반으로 줄였다.
낼 수 있는 반 토막을 모두 내고도, 숨만 쉬면 나가는 고정비는 많다. 양문형 냉장고와 김치냉장고가 돌아가고, 인터넷 TV를 보며, 여름엔 에어컨을 빵빵 틀고, 겨울엔 보일러를 팍팍 돌린다. 전기료, 수도요금, 도시가스비를 아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근천이나 자발적 가난이 나의 목표는 아니니까. 순전히 노력해야 할 것이 있다면 책을 사고 싶은 마음, 옷을 사고 싶은 마음, 아름다운 물건을 사고 싶은 마음, 그 소유에 대한 마음의 크기를 줄여야 한다는 정도. 그런데, 중요한 것은 덜 괴로울 정도로, 딱 그만큼만, 서서히.
전 직장을 그만두고 가장 놀란 점은 낮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니. 이 사람들은 일 안 하나? 회사는 안 다니나? 내 노동의 세계는 너무 좁았다. 시간에 맞춰 일하던 패턴에서 벗어났다. 하루는 아무 일정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하루는 서울에서 인터뷰 온 방문객을 맞이하다가, 하루는 연속으로 소설읽기 모임을 하다가, 하루는 ‘페미야학’ 프로그램 회의를 하다가, 하루는 ‘비혼여성아카데미’ 행사를 하다가, 하루는 뉴스레터 편집 작업을 하다가, 하루는 블로그에 새 글을 쓰다가, 하루는 회원 관리 메시지를 보내다가, 하루가 다 갔다. 이것이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활동가의 삶인가. 우리가 시간을 지켜 행한 일은 점심시간 12시에 식사하는 것. 내가 가장 열심히 한 일은 출근하고 퇴근하는 것. 우리가 가장 잘한 일은 파산하지 않고 여기까지 온 일.
나는 돌아본다. 전 직장에서 나에게 안식년을 줬더라면, 한 달이라도, 아니 일주일이라도 장기근속자에게 공식적인 휴가를 줬더라면, 비혼여성 팀장 급여를 좀 더 일찍 올려줬더라면 나는 거기서 5년을 더 일했을지 모른다. 회사가 그러지 않을 걸 알았기에 안녕을 고했다. 나는 이곳에서 여전히 돈을 더 벌고 있지 않다. 대신 시간을 더 벌고 있다. 언제 빠졌는지 모를 어금니를 해결하기 위해 10회차에 걸쳐 치과를 다녔다. ‘자기돌봄’ 제목으로 글을 썼다.
2019년 동생네가 나가 있던 뉴질랜드에 3주간 다녀왔다. 휴가 신청서는 제출하지 않았다. 내가 담당한 모임만 일정을 조정했다. 열두 시간 혼자 비행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해 연말에는 열흘간 공간비비 휴관을 알리며 비비와 함께 해외여성주거공동체 탐방 프로젝트로 프랑스와 영국에서 시간을 보냈다. 비비는 명절마다 해외여행을 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각자 시간을 빼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무리해서 가길 잘했다는 소회를 나눴다. 이어서 코로나가 왔으니 말이다. 2020년 엄마 무릎 인공관절 수술과 동시에 3주간 커튼 없이 한방에서 생면부지 환자 여섯 명과 보호자 여섯 명이 먹고 자고, 24시간을 낱낱이 보고 듣고 흉보며 생활했다. 시간을 벌어서 행한 이 모든 일이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다. 거기 계속 있었더라면 하지 못했을 일들이다.
나를 돌보고, 타인을 돌볼 수 있는 시간을 버는 일이 가능한 직장이 얼마나 있을까. 하루는 아버지 대학병원 동행을 한다. 외출하고 나온 나를 보며 엄마는 늘 안절부절못한다.
“이렇게 회사를 오래 비워서 어쩐다냐.”
“괜찮아요, 각자 볼 일 있으면 알아서 외출하고 그래요.”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에 일침이 돌아왔다.
“그르케 해서 돈은 언제 번다냐.”
나는 웃었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친구들과 함께 뭔가를 같이 해보겠다고 했을 때 형제들은 그 ‘뭔가’가 궁금했고, 엄마는 ‘같이’에 방점을 찍었다. 그리고 엄마의 당부가 있었다. ‘합자(合資)는 하지 마라.’ 합자라……. 엄마는 그때 간파했을까. 이건 돈을 많이 버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지금 주 4일 근무를 한다. 수요일은 비비를 정리하는 글쓰기 명목으로 출근하지 않는다. 명목은 재택근무고,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 곳곳 집안일을 하고, 밀린 책 읽기를 하고, 헝클어진 감정의 실타래를 풀고, 글을 쓴다. 가끔 병원, 은행, 동사무소 등 평일에 처리해야 할 일을 위해 외출한다. 한 달에 한 번 토요일에는 ‘걷기여행’에 참여한다. 한 달에 한 번 일요일에는 ‘글쓰는여자들’ 소모임을 담당한다. 수당 처리가 무의미한 직장이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비비 정기모임을 하고, 한 달에 한 번 시골 부모님 댁에 간다. 그래서 가끔 아무 일정 없는 주말의 한가로움을 즐긴다.
몸무게는 전 직장을 그만둔 그해, 그러니까 나의 새로운 직장 공간비비로 출근하기 시작한 그해부터 정직하게 해마다 1킬로씩 늘고 있다. 조직 생활 스트레스가 없어서라고밖에 아직 정확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서 퇴근 후 40분 산책하러 나간다. 40분을 걸었을 때 가장 지속해서 실천하고 있다. 돌아와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기 위해 나가지 않는 것이 좋을지 고민이다. 다이어트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신건강을 위해서 나가는 걸로.
나는 전과 같지 않은 이 전환의 삶이 몹시 불행하지 않으며, 마냥 행복하지 않으며, 때때로 흥미롭다. 나는 나쁘지 않은 이 정도가 딱 좋다. 이를테면 이런 하루. 재택근무하는 수요일, 알람 없이 일어나, 회원이 분양해줘서 심은 명월초가 새잎을 내놓았는지 베란다를 나가보고, 좋아하는 커피잔에 탄 커피믹스, 동생이 보내준 사과 하나, 엄마가 빼준 가래떡 한 가닥으로 차린 조식을 먹고, 나의 급여로 산 소설 전문 잡지 『악스트』 인터뷰 코너를 하나 읽고, 근로장려금으로 마련한 노트북을 켜서 글을 조금 쓰고, 천변을 나갔다가 들어오는 길에 작은도서관에 들러 상호대차로 신청한 책을 받고, 빵집에 들러 모닝빵을 사고, 소설을 읽다가 내일은 사람을 만나러 공간비비에 나갈 생각으로 잠을 청한다. 50이 넘어서 언제 잘릴 걱정 없이 내일 아침 출근할 곳이 있다니 이 얼마나 다행인 일인가. 돌아와 적요를 즐길 집이 있다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인가. 나는 이것으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