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행복을 포기하겠습니다. (3)
집착, 꼭 안될 걸 바라지...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었나 보다. 조례시간인지, 종례시간인지... 고3들이 빨리 졸업하고 어른돼서 대학도 가고, 미팅도 하고 싶다는 말에 담임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한다.
"이때가 제일 좋을 때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설날 아침 가족들이 모여 앉아 다 같이 떡국을 먹으려는데... 6살 조카가 어제 할아버지, 할머니께 선물 받은 장난감에 정신이 팔려있다.
"떡국 먹어야 한 살 먹는 건데..."
라고 하자 마지못해 떡국을 먹기 시작했다. 조카만 할 때 두 살 더 먹겠다고 떡국 두 그릇 먹던 일이 생각나서,
"떡국 두 그릇 먹으면 두 살 더 먹는 거야... 이거 다 먹고 또 먹을까?"
조카는 음식을 씹느라 대답할 수 없었다. 대신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갑자기 궁금해져서 몇 살 더 먹고 싶어라고 물었다. 그러자 상에서 살짝 물러나더니 발아래로 손가락 열 개를 전부 펴 보였다. 처음엔 뭔가 수줍어서 조심스럽게 대답한 건가 싶었다. 그래서,
"어후~ 열 살이나? 열 살이나 더 먹어서 뭐 하게?"
그랬더니 조카가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그리고 가만히 자기 손가락 쪽을 응시했다. '아하~ 발가락 포함이구나...' 그러더니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렇지 그 나이 때는 구속받는 게 많아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지... 빨리 어른돼서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고... 하지만 막상 어른이 되고 나면... 아휴 지금이 좋~을 때다. 나중에 군대 가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조카가 떡국을 먹으면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문득 회사에서의 내 모습이 겹쳐졌다. 빨리 뭔가가 되고 싶어 하던 내가... 지금은 떠났지만, 회사에서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나면, 저 구석에 외떨어져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곳에 짱 박혀 농땡이를 부린 게 아니다. 거기에 적혀있던 문구 때문이다. 읽고 나면 힘이 좀 났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사람은,
어릴 적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하고, 어른이 되면 다시 아이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젊을 땐 돈 번다고 건강을 모두 바치고, 늙어서는 번 돈을 모두 건강에 바친다.
다시 생각해 보니 힘들어서 동굴로 숨은 거니까 농땡이 부린 게 맞다. 이런 문구에 위로받으며 버텼는데... 이렇게나 힘들었는데... 퇴사 직전에는 올챙이 적 생각 못하고, 어디선가 이런 문구에 위로받으며 숨죽이고 버텼을 후배들을 못 챙겼다. '등 떠미는 상사는 되지 말아야지...' 다짐했건만, 결국 이해보다는 서운함이 앞섰다. 내가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갑질 상사'가 되어 있었다.
정과 오지랖, 측은지심과 숨은 갑질...
우리나라는 누군가, 아니면 어떤 시기나 세대가, 특별히 힘들다고 인정받으면 전 국민적으로 '우쭈쭈'해 주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 언론에서 떠들어 댈 때 그런데... '情'이라고도 하고, '오지랖'이라고 폄훼되기도 한다. 하지만 모두가 부모의 마음이 되어 '측은지심'을 발동시킨다. 어떻게 보면 대상을 떠받들어 모시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 결과로 이런 일이 발생한다.
대입 시험날, 지금으로 치면 수능날, 전국에서 007 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온갖 일들이 벌어졌다. 경찰차 호송을 받으며 시험장에 도착하기도 하고, 퀵서비스 오토바이에 실려오기도 하고, 요즘은 더 심해져서 아예 출근시간을 늦추기도 하고, 듣기 평가 시간에는 비행기 이착륙도 안 한다지? 인생에서 처음 맞닥뜨린 큰 갈림길에서 실수할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개인이 책임질 일에 전 국민이 나서서 배려하고 도와준다.
더해서 시험장 입구에 도착하면 학교마다 후배들이 몰려와서 응원전을 펼치기도 하고, 엄마들은 갓바위나 용하다는 어딘가를 찾아가서 치성을 드리기도 하고, 교문에 엿을 붙이며 밖에서 애타게 기다리기도 했다. 하지만 후배들은 그 추운 날 좋은 자리를 맡는다며 길거리에서 밤을 새우며 비행을 저지르기도 하고, 수능 백일주(酒)라며 미성년신분으로 음주를 하기도 했다. 시험 잘 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지만... 염원이 모이고 모여 무언가 힘을 발휘할 거라는 믿음이 작용한다.
결국,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모순과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행복을 추구할수록 그 자체가 더 큰 괴로움을 낳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이런 모순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 이상 행복을 좇기보다는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행복을 포기한다고 해서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로 인해 자유로워질 수 있다. 좀 덜 행복하고, 좀 덜 불행한 상태로...
그리고 그 자유 속에서 진정한 평온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