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행복을 포기하겠습니다. (4)
만약 돌아갈 수 있다면, 내게 기대하게 만드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이었는지, 아니면 졸업을 앞둔 어느 겨울날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TV에 옛날 007 시리즈가 방영되고 있었는데, 무인도의 바닷가에서 육감적인 야생의 본드걸이 한쪽에 칼을 차고 나타났다. 문명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지만 상식이 풍부한 본드걸을 보고 제임스 본드가 물었다. 무인도에서 혼자 살았는데 어떻게 아냐고...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백과사전으로 'S' 항목까지 공부했어요. 그래서 모르는 게 아직 많아요."
'앗! 그렇구나... 백과사전으로 공부하면 되는구나...' 이사 온 동네에는 형 누나가 없었다. 어릴 땐 동네 형, 누나들 따라다니고 같이 놀면서 많이 배웠는데... 여기서는 내가 가장 나이 많은 형이었다. 학교를 안 가도 돼서 집에서 뒹굴거리다가 이 영화를 보고는 책상 앞에 앉아 백과사전을 펼쳤다. 수학을 좋아한다고 하면 어른들이 좋아했기에... 뭣도 모르고 나의 최애 과목은 항상 '수학'이었다. 아니 '산수'가 맞겠구나.
백과사전 수학책의 첫 단원은 '집합'이었다. X = {1, 2, 3, 4, 5...}라고 쓰는 것을 초등학교 산수시간에 배웠기 때문에 자신 있게 책을 펼쳤다. 그런데 처음부터 X = {χ|χ는 자연수}가 나왔다. 분명히 읽을 수 있는 글자고, 한글이 대부분인데... 집합시켜 놓으니 초등학교 정규교육을 마친 13살 소년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뭔가가 되어 있었다. '엥? 이게 뭐지?'
호기심은 죄가 될 수 있다.
특히 '|', 이 처음 보는 기호는 당연히 읽을 수 없었다. 읽을 수 없으니 진도를 나갈 수 없었고,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려도 계속 나오니 답답함만 더해졌다. 그렇게 야심 차게 펼친 백과사전 첫 장부터 콱 막혀버렸다. 바로 해결사 엄마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얼마 후, 어느 집으로 보내졌다. 뉴스에서 학원에 다니는 청소년들의 비행이 많이 보도되던 때다. 게다가 엄마도 중학생 아들이 처음이다 보니 수소문 끝에, 고려대 러시아어과를 나온, 어느 처음 보는 누나네 집으로 보냈다. 매달 10만 원이 든 봉투를 갖다 줬는데, 그땐 꽤 큰 액수였다.
처음 만난 누나는 아버지들끼리 잘 아는 사이라며 나를 아기 때 봤었다고 했다. 그 말에 안심이 됐는지 나는 다짜고짜, "X = {χ|χ는 자연수}" 이걸 물었다. 혼자서 많이 답답했었나 보다. 별거 아니었다. 그냥 '바(bar)'라고 읽으면 됐다. 그리고 중괄호 안에 숫자를 일일이 쓸 수 없어서 그냥 집합 조건을 풀어서 쓴다는 것도 배웠다. 드디어 궁금증이 풀렸다. 답답함이 사라지고 다시 평온함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 뒤로 누나와 부모님은 합심하여 나를 의대에 보내려고 했다. 나는 그냥 궁금증만 풀면 됐는데, 엄마는 누나에게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 중학교 반배치고사를 준비한다며 서점에 가서 문제집을 사 오라고 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이 모든 고통의 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악마의 책을 사 왔다. 문제집은 면허시험 문제집처럼 길게 시험지 모양으로 생긴 책이었는데, 초등학교와 다른 점은 문제가 친절하지 않았다. 일단 문제 자체가 길었고...
호기심은 죄다.
아니다! 그냥 공부할 마음 없는 초등생 사내애에게는 싫은 대상이었다. 이 문제집을 엄마 앞에서 매 맞고, 구박받아가며 억지로 풀었다. 이미 궁금증은 풀렸고, 더 이상 관심이 없는데... 게다가 주변에서 반배치고사를 준비하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엄마는 억지로 자기 앞에 앉혀놓고 풀게 했다. '구속'이라는 단어를 몰라도 어떤 것인지 체감은 했을 거다. 만날 눈가에 눈물이 맺힌 체 울면서 풀었다. 그리고 풀고 나서가 더 고역이었다. 채점이 남아있었다. 틀렸다고 혼났고, 틀린 문제를 다시 풀어보게 할 때는 왜 이렇게 할 수 있는 걸 처음부터 못했냐고 혼났다.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그날도 엄마 앞에서 문제집을 풀고 있었고, 동생은 마당에서 강아지와 놀고 있었다. 내가 제대로 안 풀고 대충 답만 적는 것을 눈치챈 엄마가, 지금 그 문제가 뭘 물어보는 거냐고 물었다. 음... 사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였으니까... 나는 겁이 덜컥 났다. 혼날까 봐 주눅이 들어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엄마가 파리채를 들어 팔? 머리?를 때렸다. 내가 많이 답답했나 보다. 지금 물어보면 기억 안 난다고 한다.
주사위를 평면도로 그려놓고 육면체로 만들었을 때, 대칭되는 면끼리의 합이 모두 같다면 주사위의 비어있는 면들의 숫자의 합이 얼마냐는 문제였다. 흐흐흐 글을 쓰다 보니 문제도 안 까먹었네... 아~ 쓰기 싫어지는데...? 어른 입장에서 보면 별로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하는 13살 사내애, 게다가 혼날까 봐 주눅 들어 있는 아이에게는 사고를 정지시킬 정도로 이해가 안 되는 문제였다. 문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 아마 엄마도 처음에는 잘 설명해 줬을 거다. 그런데 못 알아들으니 답답했겠지...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난 되게 착한 아들이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동생이 벌거벗은 채로 문을 열어줬다. 엄마는 아마 나와 같은 방법으로 동생을 훈육하려 했었나 보다. 뭔가 둘 사이에 자존심 싸움 같은 게 벌어졌는데, 혼내면서 벽시계를 바닥에 갖다 던지라고 시켰나 보다. 사실 아이에서 그런 폭력적인 행동을 시키면 안 되는데... 아마 나 같았으면 차마 그럴 수 없어 잘못했다고 울고불고 빌었을 건데... 동생은 그냥 갖다 던져버렸나 보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엄마는 옷을 홀딱 벗겨 매질을 하고 있었다.
하교해서 초인종을 눌렀는데 동생이 발가벗고 휘리릭 나와서 문을 열어주길래 깜짝 놀랐다. 아마 그때부터 엄마는 동생과 나의 방향이 다름을 알아차린 것 같다. 그 뒤로 나는 계속 내 방에 갇혀 공부를 해야 했지만, 내 방을 가질 수 있었다. 동생은 상대적으로 방목되었지만, 소원이 자기 방을 갖는 거였다. 방학 숙제도 동생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뒀다. 나는 일일이 점검받았다. 개학날이 되면 상으로 공책을 수십 권 받아왔다. 나는 그 공책에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지금 같으면 반 친구들에게 나눠주며 민심을 얻었을 텐데... 흐흐흐
반배치고사를 드디어 치르고, 입학했다. 사실 반배치고사는 문제집과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들이 나왔다. 그냥 초등학교 수준의 문제들 뿐이었던 것 같다. 이후로도 엄마의 이런 시도는 계속됐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뭔가를 이야기해 주면 나는 대화를 한답시고 엄마에게 말했다. 그러면 엄마는 그걸 시켰다. 안 한다고 하면 매질, 조금 커서는 잔소리를 했다. 아마 내가 엄마와의 대화를 기피한 것은 사춘기 때문이 아니었을 거다.
죗값이 달더라...
그렇게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엄마는 자신의(?)... 내 성과가 궁금했는지, 반배치 고사 성적을 알아오라고 했다. 친구들 중에는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알려달라는 사람도 없었다. 엄마는 계속 닦달했다. 어쩔 수 없이 교무실이라는 곳을 처음으로 찾아가서 담임 선생님께 반배치고사 결과를 물었다. 선생님이 조금 놀라시면서 기다리라고 했다. 주위의 다른 선생님들도 쳐다봤다. 이런 애는 처음이라는 눈빛이었다.
결과는 전교 7등이었다. 엄마는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뒤에 담임 선생님이 방과 후에 남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내 시험지를 봤다고 했다. 사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다른 친구들은 커닝도 많이 하고, 찍은 애들도 많았다고 했다. 시험 감독할 때도 생활부나 성적에 반영이 안 되는 시험이어서 크게 의미를 안 뒀는데, 이렇게 결과를 물어오는 애는 처음이라고... 시험지를 보니 진짜로 풀어서 제출한 흔적이 나밖에 없다고 했다.
이걸로 선생님들 사이에 내 평판이 확 올라갔다. '뭐야? 전화위복이야 뭐야?' 남중이었는데, 그땐 정글 그 자체였다. 당시 소문이긴 했지만, 폭력조직과 연관된 반항심 심한 친구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학교에 비상이 걸렸었다. 그래서 좀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드잡이를 했는데... 이 일로 선생님들 사이에 평판이 좋아지면서 좀 편하게 다닐 수 있었다. 명찰을 잊어먹고 와도 봐주고, 배지를 안 달고 와도 그냥 통과시켜 주었다. 그냥 모든 사건의 용의선 상에서 모두 배제되었다.
나라는 것을 잃어버리고, 나는 것을 잊어버리다.
학생이 할 일이 '공부'아니고 뭐가 있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 시키는 대로 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서, 강요해서, 억압해서, 강제해서... '나는 상처받았다'라고 고백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게 요즘 트렌드인 것 같다. 하지만 그 덕분에 누릴 수 있었던 것에 대한 이야기는 모자라다. '나는 상처받았지만, 결과는 달콤했다.' 이게 부족하다.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고, 만사는 반드시 등가교환이라고 믿는다.
나에게로만 한정지어서 얘기해 보면, 그 달콤함을 누리다가... 정확히 달콤함에 빠져 있어서 단지 몰랐다가 인생의 쓴 맛을 보고 달콤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쉽고 편하게 쓴 맛의 원인이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라고 한동안, 아니 좀 오랫동안 생각했다. 상처받기 싫음을 결국 날개를 잃어 나는 법을 잊은 탓으로 돌렸다.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는 단편으로 나를 일반화했다. 원인을 단정 지었고 수렴시켰다.
하지만 인생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어릴 적에는 호기심과 열정으로 가득 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호기심은 때로는 고통과 스트레스를 낳기도 한다. 무언가를 배우고자 하는 순수한 욕망이 결국엔 나를 얽매이게 하는 현실과 맞닥뜨리게 될 때, 인생의 아이러니와 마주하게 됐다. 인생은 언제나 모순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 행복이 나중에 불행의 원인이 될 수 있고, 지금 불행이 나중에 행복의 원인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모순이 존재하기에, 나는 더 이상 행복을 추구하지 않기로 했다. 감정의 널뛰기를 피하고, 잔잔한 물결 속에서 차분해 지기로 했다. 어쩌면 이러한 선택이 인생의 본질을 꿰뚫는 것일지도 모른다. 행복과 불행의 극단을 오가며 삶의 의미를 찾기보다는, 그저 덜 격렬한 감정 속에서 나 자신을 찾아가고 싶다. 앗! 아니다. '나'를 찾는다는 말에도 오류가 많다. 나를 놓아주고 싶다.
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