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과 함께하는 인생
대개 많은 고뇌는 불확실성에 기인한다.
불확실성이란, 미래에 대해 예측할 수 없는 것.
해는 매일 아침에 뜨고 저녁에 지며,
봄-여름-가을-겨울은 매년 순환하고,
응애하고 태어난 아이는
소년, 청년, 중년, 노년을 거쳐 죽음에 이른다.
이처럼 자연의 법칙, 하늘의 일은 예외 없이 진행되기에 예측이 가능하며, 심리적&물리적으로 대비할 수 있다.
다만, 인간 세상의 일은 변화무쌍하다.
변화무쌍함은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불확실성은 불안감과 고뇌를 동반한다.
인간은 응애하고 태어난 순간부터
불확실성에 대비하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살아간다.
불확실성 씨앗에는 위험과 행운의 열매가 모두 있다.
그러기에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회피행위와 쟁취행위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다만, 사람마다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는 다르다.
그리고 다른 관점으로 인해 수반되는 행동도 다르다.
간단히 말하다면, 회피형과 쟁취형이 있다고 하겠다.
어떤 불확실성은 회피와 쟁취 행위에 따라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나의 Input을 통해 Output이 바뀔 수 있다.
- 쟁취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좋은 대학에 가는 것. 그래서 우리는 성공을 위해 인생의 1분기를 학업에 매진한다.
- 회피의 극단적인 예는 사고가 날까 봐 무서워서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불확실성은 나의 Input과 상관없이 나에게 다가온다. 이것을 ‘운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운명적인 만남, 행운으로 인한 사업성공 일수도 있고,
- Covid-19 같은 질병재해, IMF로 인한 실직일 수도 있다.
불확실성에 대해 two by two로 나누어 본다면,
운명론자(낙관적/비관적), 행위론자(쟁취형/회피형)로 분류가 가능하겠다.
다만, 모든 사람이 정확히 재단되는 것은 아니고,
어느 쪽에 더 치중하는가 하는 편중성으로 분류할 수 있을 따름이다.
현재의 나는 쟁취형 행위론자에 가깝다. (다음으로는 > 낙관적 운명론자 > 회피형 행위론자 > 비관적 운명론자 顺)
쟁취형 행위론자는 상대적으로 볼 때, 불확실성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만 나의 Input이 원하는 Output을 가져오지 못했을 때 절망한다.
불확실성이 가속화되는 시대.
인위가 자연을 뛰어넘을수록 불확실성이 가속화된다.
이제는 기후에 의한 재해와 질병으로 인한 재난에 더해 다가올 AI의 공격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이다.
열린사회에서 닫힌 사회로의 이행.
개천에서 용 나던 시대가 지나가고, 부가 대물림 되는 사회,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가 심화되는 시대이다.
대승적으로 승화해서 본다면,
인생은 짧은 여행에 불과하며,
결국 생(生)과 사(死)의 자연법칙 안의 부분에 불과하다.
그래도 지금으로서는 영원할 것처럼 느껴지는 인생,
나에게는 모든 것인 인생이기에 초연하기 어렵다.
불확실성과 함께하는 인생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A. 마음으로는 운명론자처럼 받아들임
- 지나친 낙관도 비관도 아닌 중성적으로 덤덤히
B. 몸은 행위론자처럼 행동함
- 나는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C. 그리고 일상(日常) 온전히 산다.
- 곁에 있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 앞에 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고,
- 풍경과 풍류를 심신으로 느끼고 즐긴다.
미래의 나를 준비하되, 오늘의 나는 오늘을 산다.
어제의 나는 불확실성으로 인해 밤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오늘의 나는 비행기를 타고 구름 위에 떠 있으며,
음악을 들으며, 모처럼 개똥철학 같은 글을 쓰고 있다.
늘 그렇듯이 깨닫는 것을 실천하는 것은 깨닫는 것보다 어렵다.
2024.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