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씨 일파 중 가장 악명 높았던 민영휘는 자작의 작위를 받은 친일파다. 수백 년 내 없었다는 수준의 최고 갑부에 오른 자이기도 했다. 동학농민군도 민영휘에 대해서는 이를 갈았다. 이 민영휘가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고종에 금송아지를 바치자 고종은 “(직전의 관찰사 가리키며) 그놈은 참으로 큰 도둑이로군, 관서에 이렇게 금이 많은데 그가 혼자 독식을 했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누가 진짜 도둑(?)인지에 대한 논쟁은 차치하고, 별다른 기업이 없던 조선시대 경제에서 국가는 (거의 독점적으로) 자원을 배분하는 권력을 가졌다. 관료는 이 중요한 권력에 참여할 수 있었기에 과거시험이 입신양명의 통로가 되었다. 이 권력을 가져야 민영휘처럼 수탈도 가능했다. -----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면 할수록 자원배분 권력을 국가가 아닌 ‘기업’이 갖게 된다. 과거 육사의 인기가 높았고, 그 뒤로는 사법시험과 행정고시의 위상이 높아졌다. 요즘 수출대기업 임직원의 위상이 높아졌다. 워라밸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 남양유업 홍 회장이 배임으로 구속되었다. 다양한 방법으로 회사의 돈을 빼먹었는데, 이 역시 홍 회장이 기업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최태원 회장과 노소영 관장의 이혼사건에서 2심 재판부는 노 관장에게 막대한 재산분할을 인정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300억 원을 최종현 회장에게 준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당시는 자원배분의 권력을 권위주의 정부가 행사하고 있었고, 재벌로부터 상당한 수준의 삥을 뜯을 수 있었다. ---- 자원배분 권력, 이권의 기득권은 너무도 막대하기에 그 구조를 건드리는 개혁은 엄청난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김영삼 정부에서 금융실명제는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비밀 속에서 전격적으로 시행되었다. YS는 긴급재정경제명령권이라는 이례적이고도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나는 금융실명제가 없었다면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금융실명제 이후 검은 자원배분 통로는 거의 막혔다. 대신 재벌과 중소 지배주주는 제도화된 방법으로 꾸준히 주주들의 돈을 수탈해 자신의 몫을 불렸다. 자사주마법을 이용해 인적분할하고 지주회사를 만드는 건 2002년경 LG가 한 이후 거의 모든 기업이 따라 했다. 불공정 합병(+주식의 포괄적 교환이전), 알짜 계열사나 자산의 저가 양수도, CB와 BW 저가발행, CB 리픽싱과 콜옵션행사, 물적분할, 자사주 교환과 (재단, 우리사주 등) 처분, 저가에 소액주주 축출, 고가 IPO 등 이루 열거하기 곤란한 수준의 다양한 제도화된 방법을 사용했다.
어떤 방법이 한번 유행을 타기 시작하면, 수많은 재벌과 중소 지배주주가 따라 했다. 2000년대 이후 최근까지 대형로펌이 크게 성장한 것도 이런 거래를 밀착해 자문했고 그 과정에서 일반주주로부터 지배주주로 어마어마한 부의 이전이 발생했으며, 대형로펌이 그 과실을 일부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아연 유상증자 철회에 이어 하이브 방시혁 대표와 PE 사이의 이상한 주주간계약 등 문제가 거듭 발생하고 있는데, (유튜브와 미국주식에 대한 투자경험축적으로) 자본시장의 불공정구조를 인식하는 눈들이 많아지면서 재벌, 중소 지배주주와 대형로펌 사이의 밀착, 협력이 한계를 보이는 신호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이런 일이 발생하면 할수록 재벌과 중소 지배주주의 대형로펌에 대한 신뢰는 하락할 것이며, 대형로펌도 먹거리의 한계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 90년대 중후반부터 자원배분 권력의 중심은 국가에서 기업으로 이동하였다. 당시는 재벌 1, 2세가 왕성히 활동하던 시기였는데, 우리나라 재벌은 2세들도 대체로는 창업주와 동업자나 마찬가지의 관계로 일하며 기업을 키웠다. 지배주주들에게 경영능력과 열정이 있던 시기였다.
김영삼 정부 이후 현재까지 어느 정부도 변변한 경제민주화 입법을 하지 못했다. 권력을 일반주주에게 이전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 결과 현재는 거의 모든 기업에서 3세, 4세에게 권력이전이 완료된 상황인데, 이들은 경영능력이 검증되지도 않았고 열정도 없어 문제가 되고 있다. 기업 간 경쟁이 국경을 넘어 이루어지기에 약간의 능력부족과 나태함도 큰 차이를 낳을 수 있다. 국민의 부와 국가의 흥망성쇠가 이들의 경영능력에 달린 백척간두의 상황이다. ---- 재벌과 중소 지배주주 3세, 4세의 권력에 도전할 거의 유일한 세력이 MBK와 같은 PE라 할 수 있다. 나 스스로 PE가 경영하는 기업에 몸담고 있기에 그 생산성과 효율성을 몸소 체험 중이다. 민주당의 상법 개정안이 제출된 상태지만 상법 개정이 되든 안 되든 현재의 룰, 제도적 환경에서도 재벌과 중소 지배주주로부터 PE로의 권력이동은 필연에 가깝다. 시기의 빠르고 늦음 정도가 문제일 뿐이다. ---- 이 와중에 28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엄청난 발언을 했다.
언론에 의하면, 이 원장은 “금산분리(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 이슈는 그동안 산업자본의 금융자본 인수 부작용을 중심으로 다뤘다. (MBK의 영풍 인수 시도를 계기로) 금융자본의 산업자본 지배에 대한 부작용을 고민할 때다. 산업은 앞으로 20~30년 동안 중장기적으로 내다보고 육성해야 한다. 하지만 금융자본은 투자금 회수 차원에서 5~10년 안에 인수한 기업·사업을 정리해야 된다. 금융자본이 지배하는 기업은 중장기적으로 사업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크다. 금융당국이 이 같은 점을 화두로 삼아 고민하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15/0005062733... ---- 어떤 사회가 합의해 자원배분 권력에 관한 룰 세팅을 바꾸는 건 종종 있는 일이다. 토지개혁도 그런 류의 제도변혁이고, 앞서 말한 금융실명제도 그런 변혁의 일환이다. 변혁은 개혁적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지만, 반동적인 방향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 반동적 방향으로의 변혁은 아쉽지만 그게 그 사회의 역량이고,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저개발국은 불공정한 룰이 지속되고 있기에 저개발국이다.
그러나 국회 입법 수준의 사회적 합의나 정당성 없이 검사 출신 금융기관수장 중 1명이 룰 세팅을 바꾸려 하는 건 솔직히 분노할 수밖에 없다. 주어진 권한에 비해 너무 큰 월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런 소수가 자의적으로 의도한 방향으로 우리 자본주의 역사가 흐른다면 너무도 원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