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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셔니 Dec 21. 2024

구진천,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겐 국경이 있다


어제 12월 20일, 반도체 기술의 중국 유출 알선을 도운 협의로 국내 기업의 한 임원이 기소됐다. 지난 9월에는 4조 원을 넘게 들여 개발한 D램 공정을 유출한 혐의로 관계자들이 구속 송치되어 충격을 주기도 했다. 


신라 시대에 구진천이란 인물이 있었다. 문무왕 때 활약한 그는 쇠뇌 개발자였는데, 그가 만든 쇠뇌는 천 걸음 떨어진 목표까지 날아갈 수 있어 ‘천보노’라고 불렸다고 한다. 만일 사실이라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거리의 2~3배에 가까운 사기적인 성능이다.


그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중국 당나라에서 그를 강제로 소환한다. 이미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은밀리에 신라와의 마지막 일전을 준비 중이었다. 적국의 전략기술을 미리 빼 오겠다는 심산이었던 것.


하지만 어렵게 데려온 구진천은 당나라의 기대를 철저히 배반한다. 그가 만든 활은 불과 30보 밖에 나가지 않았다. 구진천이 ‘재료가 나빠서 그렇다’고 핑계를 대자 당나라는 사람을 신라에 파견해 재료를 구해온다. 하지만 그 재료로 만든 활도 60보 밖에 나가지 않았다. 이 정도면 도저히 실전에 쓸 수 없는 하자품에 가깝다.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있진 않지만) 구진천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얼마 안 있어 두나라가 실제로 격돌해 나당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당나라의 국력이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었고 특히 기병력이 압도적이었는데, 결국 신라가 전쟁에서 승리한 데에는 우수한 쇠뇌의 역할도 컸을 것이다. 구진천은 자기 목숨을 걸고 소중한 기술을 지켜냈고, 결과적으론 나라를 지켜내는데 기여했다. 


구진천은 6두품 기술자로 낮은 신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청 대단한 고위 귀족도 아니었다. (지금에 비유하면 메이저 연구소의 개발담당 임원 정도 아니었을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보여준 행적은 오늘날 우리와는 너무나 비교된다. 


뭐가 문제인 걸까? 기술인들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 우리의 태도? 돈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자본주의? 이 나라의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자신감의 상실? 분명한 것 한 가지, 고대인들이 우리보다 특별히 더 윤리적이거나 고결하진 않았을 것이다. 개개인의 문제로 돌리기에 아서 시스템 적, 사회문화적 고찰이 필요한 시점일지도 모르겠다. 


p.s. 구진천이 등장하는 공식 사서는 삼국사기가 유일, 그래서인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럴 땐 야사에 담긴 사소한 이야기도 놓치지 않고 자기 역사를 풍성하게 만드는 일본의 치밀함이 부러워진다. (대중 매체에서 슈퍼스타 급으로 연출되는 야마모토 간스케는 오랫동안 ‘가상의 인물’이란 의심을 받았을 만큼 기록이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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