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진창 복잡한 인생, 자칫하다간 방관할 수 있으니 정신 차리고 살아내자
소설의 첫 단편인 <세상 모든 바다>를 읽으며 이야기 속 엉킨 사건의 복잡함과 가치판단 불가능함에 짜릿해졌다. 최애의 콘서트장에서 축제 분위기를 느끼고, 같은 그룹의 팬과 스몰토크를 주고받고, 기분이 좋아진 주인공 하쿠는 몇몇만 아는 게릴라 콘서트 소식을 슬쩍 전해준다. 하쿠는 게릴라 콘서트 장소에 가지 않지만 하쿠의 이야기를 들은 그 팬은 게릴라 콘서트 장소로 향하고, 세계 평화를 위한 시위가 참담한 비극으로 이어지고, 사망자 명단에서 확인한 그 팬의 이름…… 하쿠는 게릴라 콘서트에 대한 얘기를 괜히 꺼낸 걸까? 확실하지 않은 정보는 전달하면 안 되는 거였을까? 그 사람의 죽음은 하쿠의 잘못일까? 시위를 주동한 사람들도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면 그들도 피해자일까? 하쿠는 용서를 구해야 할까? 그 사람의 죽음은 정말 하쿠의 잘못이 아닐까?
그래, 삶은 이렇게 뒤죽박죽, 엉망진창으로 얽혀 있는 거지.
그런데 다음, 그리고 그다음 단편으로 넘어가면서 어느새 주인공들은 그냥 우두커니 존재할 뿐이다. 알바를 하고, 고전 읽기 수업을 짜고, 덕질을 하고, 덤벨을 들어 올리며 뭔가를 해보려고 하는데 그 모든 노력과 결과는 점점 더 미미해질 뿐이다. 적당히 애쓰는 그 모습이 마치 벌레가 뒤집어진 채로 버둥거리는 것처럼 하찮게 느껴진달까.
책의 중반을 넘어갈 때 난 어느새 거리를 두고 저 멀리 상공에서 그들의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있고, ‘그래! 이게 지금 우리의 모습이지’라며 반갑던 외치던 마음은 사라지고, 살고자 하는 너와 나의 뒤척임 들을 허우적거림으로 보게 된다. 사소한 결심, 작은 깨달음, 희미한 기쁨… 찰나에 없어지는 그 짧은 순간들에 점점 무뎌지며 내 시선은 무게를 잃고 중력을 거부한 채 떠올랐고, 땅 위에 나자빠진 주인공들-우리-의 모습을 마치 발버둥 치는 벌레 바라보듯 방관하게 되었다.
왜였을까? 왜 내 시선이 이야기 속에서 프레임 밖으로, 점점 더 위로, 주인공들을 내려다보는 위치로 옮겨간 것일까? ‘그래, 나도 다 해봤지. 나도 느껴봤지. 나도 실패해 봤지.’ 같은 높이에 서지 못하고 내려다보는 것. 참여하지 않고 방관하는 것. 삶을 살지 않고 바라보는 것. 그저 볼뿐이라니. 이건, 위험하다! 그래, 삶을 향한 내 태도는 위험하다.
지금 당장 앵글을 낮추어야 한다.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 눈앞으로 그 씬(Scene)을 줌인해서 당겨와야 한다. 기어코 그 씬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참견해야만 한다. 삶은 사는 것이지 바라보는 것이 아니니까.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역시 그렇게 읽혀야만 한다.
하찮아 보이는 우리의 움직임에 시선을 맞추어야 한다. 미물의 버둥거림, 허우적거림으로 보이는 그 움직임은 사실 뒤집힌 땅과 하늘을 다시금 뒤집어서 그 위에서 제대로 살아 보려는 고군분투이며, 4kg이라도 더 무거운 덤벨을 기어코 짊어지며 내 한계 혹은 능력을 나타내는 저 두 자리 숫자를 세 자리로 바꿔보겠다는 노력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눈 아래 세상은 시시해진다. 세상을 시시하게 보는 시선을 가진 나 또한 같잖은 존재가 된다. 윗자리를 꿰차고선 편 나누고 왕따 시키는 놈들을 닮아간다. 이건 이런 거고 저건 저런 거니까 그래야만 한다고, 다른 타협은 없다고 주먹만 한 뇌로 척척 판결을 내버린다. 결국 자신도 땅 위에 속해 있음을 잊고 자칫하면 신인 줄 착각하는 역겨운 존재가 되어 버린다.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평범하고 뒤죽박죽한 우리들이여. 지리멸렬한 현생에 나도 모르게 도망치고 싶어질 때,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 싶을 때, 두 발아래서 탄탄히 우릴 밀어 올려주는 땅을 느끼며 무릎에 힘 딱 주고 기립하자. 실패한 무게에 한 번 더 도전하고, 눈앞에 앉은 날 닮은 아이에게 눈을 맞추고, 단 한 명의 청자가 있는 고전 읽기 수업 일지라도 계획하고, 알바를 나가고, 연애를 하고, 돌아와서 세 다리 상을 펴고 끼니를 챙기자. 그리고 또다시 열두 번과 반 번의 태엽을 감자. 삶은 바라보는 게 아니라 직접 살아내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