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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고 Oct 10. 2024

예소연 <사랑과 결함>을 읽고

사랑과 결함을 뒤로하고, 이제 서사 속으로 들어가자


예소연 작가의 소설 <사랑과 결함>의 단편 속 주인공들은 항상 함께다. 맹자 곁에는 석주가 있고, 희조에겐 (비록 애증의 관계이긴 하나) 미정이 있다. 성혜에겐 순정 고모가 있고 해나와 수민에겐 (든든하진 않을지언정 나름 애틋한) 아빠가 있다. ‘나’에게는 펜션 여행을 함께 떠날 진경이와 승혜언니가 있고, 또 다른 ‘나’는 셰어하우스에서 만난 미리내라는 친구가 있고, 정선언니를 찾으러 떠난 곳에는 또 다른 가족이 있다. 항상 누군가와 함께인 그들은 사랑이라는 것에 가까이 있는 듯 보이지만 누군가와 함께란 사실이 언제나 사랑받고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사랑이어야 할 상대들은 하나같이 다 불완전한 결함으로 가득한데 그것을 내보이는 데도 주저함이 없다. 사랑인지, 결함인지 모를 것들 속에서 자라난 주인공들은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에도 미적지근해지고 자기 연민에 빠졌다가 그럭저럭 살아가다가 또다시 자기 비관에 빠지는 날들을 보낼 뿐이다.




고유하지만 닮아있는, 분절된 그들


<사랑과 결함> 속 존재들은 고유함에도 고유하지 않다. 지금 읽는 단편 속 그들의 삶은 그다음 단편, 그다음의 또 다른 단편에서 이름만 바뀐 채로 변주되고 반복된다. 닮아있는 그들의 삶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이어지지 못한 채 존재한다. 소설 전반에서 그들의 분절성은 두 가지 측면에서 나타나는데 하나는 그들이 가족, 친구와 맺고 있는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야기 속 인물들은 함께 있지만 충분히 보다듬지 않으며 힘들지만 속시원히 터놓지 않는다. 고마워해야 하지만 죽는 날까지 증오하고 바른말이 맘에 들지 않아 미련스럽게 헤어진다. 그렇게 ‘나’와 ‘너’ 사이를 이해할 만한 기회를 적극적으로 놓치는 그들은 그 결과 서로의 입장이 되어보지도 않고, 한바탕 싸우고 그다음 관계로 발전하지도 못한 채 각각 고립된 상태로 성장한다.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분절성 외에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들 각각의 인생을 이끄는 서사의 분절성이다. 이야기 속 인물들에게는 서사가 없다. 지나온 길은 있으나 과거의 사건은 현재의 결과로 이어지지 않고, 점과 점으로, 개별적인 사건으로 존재할 뿐이다. 이야기 중간중간 ‘걔가 왜 그랬지?’ ‘나는 왜 이런 모습이지?’라고 느끼는 찰나의 각성, 현실의 자각들이 있지만 그 순간은 반짝하고 지나갈 뿐. 마치 그들은 오늘을 즐기라는 광고 카피의 전형을 살아내고 있는 듯 보이는데 의아한 점은 그들이 그걸 딱히 원하고 있지 않다는 것, 현재를 절대 ’즐기‘는 감정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의 현재 모습에 의아해하고 허망해한다. 무엇을 원망해야 하는지 몰라 두루뭉술 시스템을 탓해보고 사회를 욕해본다.


<사랑과 결함>이 너무나 애처롭게 와닿았던 지점 역시 이곳이다. 나와 그들은 가족의 모습도 학창 시절 경험도 친구 관계도 무엇 하나 비슷한 게 없지만 현재의 모습만은 묘하게 닮아있다. 나와 그들, 우리는 서사가 없다는 점에서 닮아 있었다. 서사를 만들어야 하는 이들이 손을 놓고 있다는 것. 만들어가야 할 이들이 지켜만 보고 있다는 것.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 어떻게 상상해야 하는지, 한없이 결정을 보류한 채 뒤로 미루고만 있다는 것. 그것은 소설 속 인물들만의 모습이 아니라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자각. 책을 덮던 그 순간 그 자각이 나를 강타했다.


이걸 공부해라, 이런 대학에 입학해라, 스펙은 이런 걸 쌓아라, 이런 회사에 들어가야 번듯하다, 이런 옷을 입어야 하고 이런 맛집을 도장 깨기 해야 하고 이런 곳에 투자해야 하며 이런 곳에 살아야 한다. ‘해야 하는 것’의 지시서를 들고 살아온 우리는 마치 지금도 누군가가 다음 방향을 제시해 줄 것처럼 결정을 미루고, 내려지지 않는 명령을 한없이 기다리며 살고 있다. 가끔씩은 나만의 것을 만들어 보겠다는 당찬 포부를 기억해내기도 하지만 옆 사람의 답을 커닝해 가며 제일 쉬운 답을 먼저 찾는다. 게다가 학창 시절 이런저런 ‘To do List’에 짜 맞춰온 탓에 능력치는 올라가 있고 선택지도 너무나 많다. 그래서 온라인 강의 검수를 하다가 어느 날 도배사 자격증을 따겠다 선언하며, 신도시 네이밍 공모전에서 우승하여 받은 상금으로는 매입할 마음도 없는 농지를 둘러보기나 한다.


내가 나의 인생으로 써 내려가고 싶은 서사가 없다는 것. 끄적끄적 개요를 짜보지만 그것 조차 남의 것을 짜깁기 한 것일 가능성이 높고, 그렇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이것은 저주다. 우린 저주에 걸린 세대이다. 이 저주는 입에 풀칠하는 것이 제일 우선이었던, 그래서 눈앞의 아무것이나 붙잡아야 했던 몇 세대 전부터, 더 나은 삶으로 가는 티켓을 발견해 낸 부모세대로 이어져 명령서에 의해 키워진 우리에게 전염되었다. 이젠 그 저주의 굴레에서 벗어날 때이다. 아마도 우리는 이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첫 번째 세대가 될 것이다.




서사를 만들지 못하는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삶은 점으로 이루어질 수 없단 것. 점과 점을 반드시 이어내야 한다는 것. 그때 비로소 나를 둘러싼 사람들, 삶에 관한 이해가 생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친구와의 오해를 쌓인 채로 놓아두지 말고, 내 문제를 엄마에게 비밀로 하지 않고, 아빠가 평생 들먹이는 NL, PD란게 대체 무엇인지 물어보고, 서로 지독히 미워하던 감정은 죽기 직전 이름 부르는 것으로 풀리지 않는 한이란 것, 그때는 이미 너무 늦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관계의 삐걱댐과 어긋남은 각자의 결함이 만나서 생겨나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그 결함의 합을 함부로 사랑이라 이름 붙이며 그대로 품는 것. 그것은 곧 나의 결함이 되어 내 안의 생채기를 만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어제는 반드시 오늘로 이어지고, 오늘이 지나면 변함없이 내일이 온다는 것. 그렇게 삶은 그 무엇도 기다려주지 않고 계속되는데 그 삶이 바로 나만의 것이라는 것. 더 이상 명령을 기다려선 안된다는 것.  지시 사항을 결정할 존재는 나뿐이라는 것. 반드시 스스로 내 삶의 서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어딘지 모르지만 가고 있는 중‘이란 말은 우스갯소리로 할지언정 스스로 절대 용인해서는 안된다. 나만의 이야기를 나만은 그리고 있어야 한다. 시작이 이러했고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이러한 것을 추구하는 중이라고 스스로 매일 되새겨야 한다. 내가 찍은 좌표는 자격증 하나 따는 것, 어떤 학교에 입학하거나 회사에 입사하는 것으로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 그것들은 단지 삶의 경로에 생겨나는 작고 작은 성공 중의 하나일 뿐이란 것을 인식하고 길게 이어지는 내 삶의 대서사를 써보는 것이 필요하다.


예소연 작가의 소설 <사랑과 결함>을 통해 불안한 점 위에 살고 있는, 결함으로 가득한 우리들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결함을 봉합하고 그 자리에 새살이 돋아 마침내 사랑이란 것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은 얼마만치의 능력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노력할 수 있느냐는 의지의 문제이다. 그 노력이 과연 무엇인가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서사에 달려있다. 나는 결함으로 생겨난 존재인가? 결함으로 가득한 존재인가? 결함을 극복할 수 있을까? 치료하길 원하는가? 결함만 가득한 이 관계를 뒤로하고 그다음 단계의 사람이 될 것인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쓰는 내 서사에 따라 달라진다. 이제 명령서는 우리의 손에 쥐어져 있다. 상처 가득한 부모의 욕망도 지우고 자격지심 가득한 친구의 질투도 삭제해 버린다.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명령서는 이제 새하얀 종이가 된다. 그리고 그 위에 어떤 인생곡선을 그려볼지, 어떤 서사를 써볼지 스스로 펜을 들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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