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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vn Jan 18. 2023

티켓은 편도행이 좋다

스물다섯, 홈리스(homeless)가 되었습니다

  

2021년 10월 24일 포르투갈행 편도행 티켓과 함께
나는 내 인생의 전부였던 한국을 떠났다.


연고 하나 없는 타지에 캐리어 하나 덜렁 들고 가 쫓겨날 때까지 살아보는 게 계획이라면(?) 계획이었다. 졸업도 못한 꼬질이 대학생이었지만 딴에 믿는 구석은 있었다.

1. 온라인 수업으로 쓸모를 잃은 캠퍼스
2. 운 좋게 붙은 시급 15달러짜리 리모트 계약직
3. 나의 개X 마이웨이 성향과 바선생 같은 생존력 (어차피 아무도 날 막을 수 없어)


무모하리만치 용감했던 만 스물넷의 나는 그 길로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도 졸업해 버리고, 성미대로 2022년을 꼴딱 졸업했다. 그렇게 일 년을 조금 넘긴 현재 나의 신분은 이러하다.

1. 1년 2개월간 16개국 28개 도시 여행 (유럽, 아시아, 미국, 남미)
2. 리모트 UX 디자이너 + 세계 각지 팀원들과 사이드 프로젝트
3. 발리에 출몰하는 취미 부자 (무에타이, 서핑, 스쿠버 다이빙, 바이올린 등)


광기 어린 2022년 한 사진으로 요약


지구 세 바퀴 반을 돌며 열흘에 한 번 꼴로 거처를 옮겨 다녔고, 몸값은 네 배 가까이 올렸다. 돈 벌며 세계를 여행하는 이 드라마틱한 서사 직전 내겐 타고난 부도, 하늘이 준 재능도, 대단한 스펙도 없었다. 내게 필요했던 건 그저 그간 옳다고 믿었던 세계를 파괴할 수 있는 편도행 비행기 티켓 한 장이었다.



한국 사람들의 컴포트 존(comfort zone)


한국 사람들은 열심히 산만큼 성공한다고 믿는다. 자본주의와 집단주의 끝판왕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경쟁은 떠나선 안될 컴포트 존이다. 적어도 평범한 인문계 학교를 나와 평범한 대학생이 된 내가 처음 마주한 불편한 진실이 그랬다.


'공부에 미친 X' 소리를 들을 정도로 아득바득 수능을 치른 후 새내기가 된 내게 찾아온 건, 캠퍼스의 낭만이 아닌 우울증이었다. 촌구석에서 학자의 꿈을 꾸던 참 순박했던 열아홉 살의 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광장에서 일장 토론을 하는, 그런 학문의 전당 같은 대학교를 꿈꿨더랬다. 부푼 기대를 안고 처음 마주한 캠퍼스는 당연히 그런 나의 로망을 박살 내기에 충분했다.


미성년 딱지를 떼자마자 당장 인생을 결정 지으라는 듯 쏟아지는 전공과 인턴십. '국영수 중심으로'에서 '문과는 경영, 이과는 코딩'으로 업데이트된 인생 성공 제1법칙. 그에 맞춰 죽은 지식을 다시 달달 암기하고 있는 고등학생 같은 대학생들. 그렇게 대학만 잘 가면 인생이 풀린다 호언장담한 어른들은 온데간데없고, 우린 다시 열심의 관성대로 스펙이란 것들을 쌓기 시작했다.


뭍에 나온 물고기마냥 나도 그들을 따라 다시 열심히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닥치는 대로 대외활동에 참여하고, 유명 기업과 대학원에 들어간 훌륭한 선배들을 쫓아다녔다. 그렇게 3학년이 되어 꽉꽉 들이 채운 나의 이력서를 마주한 순간 나는 숨이 턱 막혔다.


'내가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정말이지 치열했던 대학 3년을 왜, 무슨 목적으로 그리 열심히 살았는지 자소서 1번 문항에 단 한 톨도 남길 수가 없었다. 속이 텅 빈 깡통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한국인이 맹신하는 존버의 신화는 틀렸다. 이런 목적지 상실한 경주는 평생을 죽어라 달려도 안 끝난다.


이름난 학교나 회사에 들어가도, 계단을 아무리 오르고 올라도 내 삶은 내 의지와 무관할 게 분명하다.


그런데 우리는 왜 다 같이 남이 그린 길에 억울하게 청춘을 갖다 바치고 있는 걸까?


도대체 왜?



억울함이 정점에 다다를 즈음


나는 타이밍 좋게도 영국으로 교환학생을 갔다.


내게 든 역마살은 아마도 이곳에서 맛본 달콤한 자유의 한 자락일 것이다. 어디서 왔든, 어떻게 생겼든, 무슨 전공이든, 무엇을 입든, 무슨 대화를 하든,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든, 그 모든 갈래의 사람들이 받아들여지는 자유. 3-4개 국어가 기본인 다국어 능력자, 기타와 드럼까지 섭렵한 피아니스트, 물리학 박사 공부를 하는 라틴 댄서... 한국 사회의 공식에 전혀 들어맞지 않는 이 기가 막힌 라이프스타일의 향연들을 보며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만 같았다.


첫 해외 살이 장소였던 영국. 흐린 날씨로 놀림받곤 하지만 맑은 하늘은 그 어느 곳보다도 쨍하니 아름답다.


태어난 곳 하나 다를 뿐인데, 삶의 장르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건가? 석 달이 아니라 3년을, 아니 한 30년쯤을 이런 세계에서 살아간다면 나는 이런 형형색색의 삶들을 얼마나 더 발견할 수 있을까? 졸업과 취업이라는 내 생애 가장 큰 경주로가 펼쳐지기 직전, 영국에서의 하루하루는 내게 '너는 너대로여도 괜찮아. 남들 따라가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속삭이고 있었다.


좋은 대학, 좋은 스펙, 좋은 회사 따위의 남들이 말하는 성공 국룰 말고, 내가 정의한 나의 삶, 나의 길을 찾고 싶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칠 때쯤, 나는 잿빛이던 나의 한국을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편도행 티켓


복잡했던 사망년의 진로는 귀국 후 이 다섯 글자로 명료해졌다. 혼자 리서치를 하고 리모트잡을 잡아 고군분투했던 첫 1-2년만큼 내 인생에 간절했던 순간이 없었다. 방구석에서 '나는 지금 외국에 있다' 최면을 걸고, 휴대폰과 노트북 세팅도 전부 영어로 바꿨다. 멘토를 찾아 처음으로 링크드인 프로필도 만들어보고, 직접 템플릿을 디자인해서 레쥬메(resume)도 예쁘게 만들었다. 회사 내부 이직 기회가 생겼을 때는, 해당 포지션에 맞춰 현재 프로덕트의 문제점과 개선안을 분석한 7페이지짜리 보고서도 만들어 피칭했다. 내세울 게 없으면 포장이라도 예쁘게 해야 뜯고 싶을 테니까.


국내파라서,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경험이 없어서 안될 것이라 생각했던 일들이 그렇게 하나 둘 이뤄졌다. 막상 부딪쳐보면 별거 아닌 일들이 시작하기 전에는 한 없이 높고 먼 태산처럼 보였다. 어찌 보면 그런 꼬리표들로 은연중에 스스로를 온실 속에 옭아매고 있었을지 모른다. 돈이 있었으면 유학을 떠났을 테고, 해외에 연고가 있었으면 현지서 일이라도 해봤을 텐데. 눈에 보이는 뻔한 길이 하나도 주어지지 않았던 탓에, 오히려 리모트잡이라는 기상천외한 돌파구를 찾았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홈리스(Homeless)의 꿈을 이뤘다.



집 없는 여행 중독자의 삶이란


친구 생일파티를 하러 파리로 날아가고,

휴대폰을 털린 채 강제 디지털 디톡스 상태로 대륙을 넘고,

요가매트를 두르고 동이 틀 때까지 뮤직 페스티벌을 활보하고,

밤새 해발 2,800미터 활화산을 올랐다 이튿날 수심 18미터 바닷속을 탐험하는,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의식의 흐름, 혼돈의 카오스다. 온실 밖 세상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 한 일들 투성이다. 새로운 여행지에 나를 해방시켜 놓을 때마다, 내가 알던 세계는 깨부수어져 한층 커지고 다채로워진다. 매일매일 나의 세계를 와장창 부수는 파괴신이 되는 일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다.


홈리스 여정을 시작했던 도시, 리스본. 걸어 다니기만 해도 매번 큰절을 올리고 싶어 진다. 황송할 정도로 예뻐서.



나는 해외 취업을 하려면 토익이 몇 점 이상이어야 하고, 여행 한 번 가려면 며칠의 연차를 참아야 한다는 둥의 계산 놀이에 더 이상 관심이 없다. 나는 내게 최선이 되지 못하는 길을 열심히 달리며, 그게 너의 최선이었다고 스스로를 무한 경쟁의 쳇바퀴에 가둬놓을 생각이 없다. 그 시간에 나는 우물 밖에서 나의 도전이 어디까지 가속이 붙을지 실험하는 데 열정을 쏟을 참이다.


나의 집은 어디에나 있고 아무 곳에도 없다
Home is everywhere and nowhere


이 말장난 같은 홈리스 여정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앞으로 내가 써 내려갈 여정이 우물 안 청개구리들에게 건네는 빨간 약이 되기를 바란다. 그냥 박차고 나와보시길. 어차피 남들 따라가는 그 길 끝에 내가 원하는 풍경은 없을 테니.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고 온전히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 이기주, 『마음의 주인』


새해 카운트다운을 외쳤던 아름다운 발리 에코 해변의 노을. 내가 향하는 길 끝엔 이런 풍경이 펼쳐져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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