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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vn Apr 16. 2024

롤러스케이트를 신고 폴댄스를 추는 남자

유럽에서 생긴 일


이 남자(혹은 여자?)를 처음 본 건 2022년 초였다. 친구와 함께 리스본 시내 한 식당의 야외 테이블에서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다. 느닷없이 저 멀리 스피커에서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Overprotected'가 흘러나오고, 노란 머리의 분홍빛 형체가 쏜살같이 우리가 있는 테이블까지 다가왔다. 어찌 그리 빠른가 했더니 그는 롤러스케이트를 신고 있었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고, 허리까지 닿는 금발 가발에 하얀 은하수가 수놓아진 핫핑크 전신 쫄쫄이 수트. 범상치 않은 착장에 휘둥그레진 눈을 어찌해야 할지 정신을 못 차리던 찰나, 그 사람은 우리 테이블 바로 뒤 표지판을 타고 오르더니 그대로 폴댄스를 췄다.


그 사람이 내게 준 3분여의 충격은 2년이 지난 뒤에도 가시지가 않았다. 3월에 유럽에 갈 일이 생긴 차에 친구들을 보러 다시 들른 리스본은 여전했다. 여전히 남다른 흥을 가진 사람들의 열기가 시내 곳곳을 익살맞고 활기차게 채우고 있었다. 리스본 시내에서 자주 노는 친구에게, 그가 여전히 롤러스케이트를 신고 춤추러 다니냐 물었다. 사실 리스본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거리에서 그를 한 번쯤은 목격했을 정도로 그는 꽤나 유명인사다. 보아하니 이 사람은 아직도 종종 시내에 출몰하는 모양이었다.


나의 첫 노마드 여정을 시작했던 리스본. 이제는 유럽에 갈 일이 생길 때면 꼭 함께 들르곤 하는데, 언제든 갈 때마다 거리에서 흥미로운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외국에서는 길거리에서 상상치 못한 장르의 인간들을 목격하는 경우가 흔하다. 목격하는 순간 사고회로가 정지되는, 지구상에 하나뿐인 버전의 인생을 사는 듯한 사람들 말이다. 가령 이런 식이다.


맥도날드를 가면 개화기 시절 나올 법한 타자기를 두드리며 시를 쓰는 시인이 있고, 지하철에는 끈을 이리저리 잡아당겨 치는 수제 드럼 가방(?)으로 버스킹을 하는 드러머가 있다. 지팡이 짚고 걸어가시던 할아버지는 난데없이 버스킹 공연해 조인해 브레이크 댄스를 춘다. 공항에서 피아니스트는 본인 비행기를 놓칠 때까지 무아지경으로 피아노를 친다. 외국에서 마주하는 랜덤 버스킹이 좀 더 기대가 되는 이유기도 하다. 장르가 상상 불가라.


3월 한 달 유럽을 순회하며 다시금 이곳의 여유를 만끽하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사람들을 한국에서 봤다면, 나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동공지진 난 눈을 주체 못 하고 충격 어린 시선으로 관망했을까? 백주대낮에 미친놈이 다 있네 하고 신고를 했을까? 말세야 말세 하고 혀를 끌끌 찼을까?


보통 유럽 행인들의 반응을 관찰해 보면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1.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입을 떡 벌리고 열심히 동영상을 찍는 (나 같은) 관광객 부류. 2. 같이 흥에 겨워 냅다 옆에서 춤추고 노래하기 시작하는 부류. 3. 그리고 이런 신기한 놈들을 하도 겪어서 1도 신경 쓰지 않고 제 갈 길 가는 부류.


그런데 어느 쪽이든 사실, 공연자의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게 없는 장사다. 이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온갖 광대 퍼포먼스를 길거리에서 선보여도, 어차피 사람들은 1. 흥미롭게 관찰하거나 2. 같이 호응하거나 3. 그냥 제 갈 길을 간다. 어느 누구도 이 사람들 면전에 대고 엉망진창이라고 평가하거나 자신에게 피해를 준다 험담하지 않는다.


한 번은 전망대 계단에 앉아 아마추어 기타리스트의 락 공연을 들은 적이 있었다. 연습이나 더 하지 속으로 절레절레하던 차에, 옆에서 공놀이를 하던 어린아이들이 하나 둘 다가왔다. 그러고는 그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헤드뱅잉을 했다. 호기심 많은 아이들은 그의 펑키한 스타일을 무척이나 좋아했고 있는 그대로 즐겼다.


또 한 번은 스페인 세비야의 광장을 걷다 사람들이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서 있는 것을 목격했다. 뭘 하고 있나 다가가서 봤더니 쌍둥이 형제 둘이 그곳 행인 한 명 한 명을 잡아다가(?) 함께 살사를 추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내 외국인 친구는 냅다 원 중앙으로 가 아주 신명 나게 엉덩이를 흔들며 커플 댄스를 췄다.


어떤 미친 짓을 해도 어느 누구도 편견 어린 시선으로 보지 않는 공간.

오히려 나의 미친 짓에 동조해 많은 사람들이 더 재미나게 놀기 시작하는 공간.


새삼 나는 그런 공간이 필요해 외국으로 나왔구나 싶었다.


더닝 크루거 효과라는 인지편향 용어가 있다. 누군가 무언가에 정통한 실력자가 되기 위해서는 꼭 거치게 되는 패턴이다. 처음에는 신이 나서 우매함의 봉우리 끝자락에서 한껏 자랑하다가, 이후 본인의 본 실력을 알게 되고 절망의 계곡에서부터 서서히 비탈킬을 올라 최상위 전문가가 된다.


한국에 있을 때는 종종 내 모든 시도가 절망의 계곡처럼 느껴졌다. 어떤 일을 해도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있었고, 아무리 시험을 치르고 이력서 줄을 채워도 스스로에게 만족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외국에 나와 살기 시작한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상하게 무작정 이것저것 시도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서핑도 해보고, 다이빙도 해보고, 그림도 그려보고, 도자기도 빚어보고. 잘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재밌었다. 엉터리로 '우매함의 봉우리'에서 행복하게 뛰놀고 있는 나 자신이 그냥 멋져 보였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잘 해내야만 한다는 스스로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무언가에 부딪쳐 볼 자신감(혹은 객기)도 생긴다. 그 강박을 내려놓기가 힘들다면, 그런 강박이 없는 미친 사람들의 세상에 본인을 한 번쯤 내맡겨보는 충격요법(?)도 나는 참 좋은 것 같다.


반년 만에 다시 바이올린을 시작했다. 늘지 않는 실력에 답답해 몇 달을 지지부진하게 지냈더니, 여전히 곡조가 형편없다. 그래도 나중에는 스케이트보드를 타며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미친 버스커가 돼볼 수 있지 않을까, 상상을 하다 보면 한숨만 나오던 입가에는 어느새 미소가 번진다.


길거리에서 마주쳤던 이 미친 사람들이 내겐 용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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