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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vn Sep 30. 2023

세계여행을 한 후 잃어버린 것

역마살이라는 불치병

성인이 되고 난 후 한 번도 같은 집에 6개월 이상 머물러 본 적이 없다.


스무 살 지방에서 상경해 서울 살이를 시작한 나는, 대학 4년 내내 기숙사에서 살았다. 학교는 방학마다 청소를 한다며 수시로 학생들을 내보냈고, 방 배정도 그때마다 시시때때로 바뀌었다. 융통성 없는 시스템 덕분에 나는 일 년에 2-3번씩 이삿짐을 쌌고, 휴학을 하거나 교환학생을 다녀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소심해서 뭔가를 쉽게 버리지 못하고 고이 간직하던 어릴 적 성격은 이사철마다 어깨에 더해지는 중량을 계기로 강제로 고쳐졌다. 질렸다 싶으면 버리고, 필요 없다 싶으면 남 주고, 무겁다 싶으면 안 사고. 졸업과 함께 본격적으로 해외 살이를 시작하며 미니멀리스트 기질은 더욱 심해졌다. 외딴 여행지에서 한두 달을 버틸 요량이면 고등학교 때 쓰던 책가방 하나로도 충분하다.


이젠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일을 하고 있으니 방랑벽을 위한 좋은 핑계도 생겼다. 거처 없는 삶, 물리적 구심점이 없는 삶이 내겐 이미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원격근무를 처음 시작한 뒤 에너지를 주체 못 하고 내가 했던 짓이 열흘에 한 번씩 집을 옮기는 일이었다. 온 지구를 떠돌아다니면서!


낭만 넘치는 삶이란 거 잘 안다. 그럼에도 그런 꿈같은 삶을 살고 있는 내게 채워지지 못한 부분이 있냐고? 놀랍게도 있다.



떠도는 운명에 스며드는 사이, 나는 사는 법을 잊어버렸다.


어느 한 곳에 한 달 이상 머무르면 무료해지고, 내가 이곳에 있는 게 맞나 불안 증세가 시작된다. 내가 머무는 공간에서 자꾸 흠을 찾고, 새로운 곳으로 탈주해야 한다는 강박이 날 집어삼킨다. 현재는 발리라는 존재가 이 변덕의 구심점이 되어주고 있지만, 그럼에도 당장 1-2개월 뒤 내가 이곳에 있을지 없을지 나는 가늠할 수가 없다. 철새처럼 그렇게 떠났다 돌아와도 내 집, 동네, 만나는 사람들은 매번 조금씩 달라진다.


더 많은 것들을 쉽게 버리고, 잊어버리고, 잃어버린다. 새로운 여행지를 발견한 순간 눈이 돌아가는데, 그렇게 이곳저곳을 한없이 표류하다 보면 점점 새로운 감각에 무뎌진다. 다 봤던 거고, 했던 거다. 온갖 색들이 생동하던 낯선 거리들이 더 이상 내 눈에 같은 컬러로 비치지 않을 때 금세 실망한다.


익숙한 곳에서 익숙한 사람들과 익숙한 것들을 보고 느끼며 진득하게 머무르는 법을 나는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어떻게 한 곳에서 오래오래 머물며 깊게 유대하는 태양처럼 무거운 삶을 살 수 있었는지. 오히려 대충 머무르며 사는 듯 마는 듯 훌쩍 떠나는 떠돌이 혜성 같은 삶이 지금의 내 모습에 가깝다.


삶의 질량을 덜어내 보는 게 스스로의 시야를 넓히는 유의미한 경험임은 분명하다. 쳇바퀴처럼 회사에 옭아매어 있다면 낯선 곳에서 재충전도 해보고, 시골에서 한평생 살았다면 도시 상경도 도전해 보고 말이다.


다만 여행만 하는 삶, 언제 어디서든 일하는 삶, 한없이 자유로운 깃털 같은 삶이 그 자체로 마냥 완벽한 삶은 결코 아니다.


사람들이 동경하는 '자유로운 삶'의 본질은 자유 자체가 아니라, 그 자유를 통제할 수 있는 힘이다. 그 힘을 본인이 쥐고 있지 않은 상태로 무한한 자유를 맞닥뜨리면 장담컨대,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출근하는 삶이 그리워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나도 아직 시행착오 단계의 인간인지라, 모래성을 쌓았다 엎기를 수차례 반복 중이다. 도파민 중독마냥 극강의 자유만을 추구하며 내가 놓친 것들, 이를테면 나의 건강, 나의 루틴, 나의 사람들, 나의 집의 의미를 복기하면서 말이다.


여행하며 일하는 자유를 나는 놓고 싶지 않다. 하지만 큰 자유에는 그만큼 더 큰 책임이 따르기에 이 자유를 내 멘탈이 단단히 쥘 수 있을 만큼 정신 차리라고, 떠돌지만 말고 살라고, 온전히 살아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있다.


저 잘할 수 있겠죠!


집에서 머무는 평화로운 주말에 익숙해져 가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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