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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vn Oct 24. 2023

미국 리모트 회사 직장인의 하루

디지몬들의 놀이터를 소개합니다

실리콘밸리 디지몬들의 놀이터를 소개합니다

본격적으로 나의 놀이터를 소개하기에 앞서 먼저 나의 특수한 상황부터 언질을 주자면,


내게는 특이한 이력 사항이 있다. 바로 단 한 번도 오피스에서 일해본 적이 없는 리모트 네이티브라는 점. 대학교 때 그나마 잠깐씩 발 담가본 인턴십은 대부분 파트타임에 자율출근제, 알바는 하는 즉시 잘렸던(...) 지라, 내 팔자는 피지컬 오피스와 연이 영 없었다.


(체질이 디지몬인 건지) 유일하게 잘리지 않고 알바에서 정규직까지 치고 올라간 케이스가 첫 직장이자 현 직장인 미국 리모트 회사다. 다른 회사들과 진행한 사이드 프로젝트들 역시 기본 전제는 원격근무였다. 때문에 출퇴근 시간이 언제인지, 복장은 어떻게 갖춰 입는지, 상사에게 어떻게 인사하는지 등에 대한 눈치는 제로에 수렴하거니와, 선후배 관계나 직급 체계, 회식 등 한국 사내 문화에 대해서도 일절 아는 바가 없다.


내 데이터베이스에 비교군이 없다 보니, 처음엔 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회사 생활을 공유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그래도 이 기회를 핑계 삼아 다른 직장인 혹은 프리워커 분들의 일상을 엿보는 것도 재밌겠다 싶어, 조심스레 끄적여본다.



3년 차 실리콘밸리 디지몬의 하루일과



7시 기상, 모닝 루틴


회사는 당연하게도(?) 내가 언제 일어나 일을 시작하는지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래서 혼자서 꼭두새벽부터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다양한 시간대로 실험을 해본 결과, 신기하게도 7시대가 내 몸에 가장 맞았다. 대학 다닐 땐 11시 수업도 버거웠던 인간인데, 지금은 일찍 눈 떠지는 아침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웬만하면 오전 시간 전체는 나를 위한 시간으로 활용한다. 일어나면 침구를 정리하고 간밤에 쌓인 뉴스레터를 훑어본다. 그 외 독서, 스트레칭, 긍정 확언, 모닝 페이지, 호흡 명상 등등을 생각날 때마다 모닝 루틴에 끼워 넣는다. 그냥 종합비타민 먹듯이 아침에 하면 좋은 루틴들은 다 해봤다는 소리다. 그 이후에는 글을 쓰거나 관심 있는 분야를 공부하거나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침대에 널브러져 있어도 보고, 휴대폰을 부여잡고 빈둥거려도 보고, 몇 년 시행착오를 겪으며 내린 결론은 아침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남은 하루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아침만큼은 온전히 나를 긍정으로 이끌 수 있는 시간으로 세팅해 놓는다.



11-12시 업무 캐치업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으며 밀린 업데이트와 메시지를 확인하는 시간. 팀원들이 세계 각지에 퍼져 있어 실시간 미팅 외 커뮤니케이션은 늘 어느 정도의 딜레이를 감수해야 한다. 답장을 받는데 수일이 걸릴 때도 있는데, 각자 업무 시간과 속도를 존중하기 때문에 답장을 빨리 달라 채근하는 일은 잘 없다. 모두가 온라인에서 만나는 아바타나 다름없다 보니 커뮤니케이션 플랫폼도 그만큼 다양하다.


슬랙(Slack): 프로젝트 논의부터 캐주얼 토크까지 다양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사실상의 메인 오피스.

줌(Zoom): 직접 만나 논의가 필요할 때 활용하는 미팅룸.

지라(Jira), 컨플루언스(Confluence), 에어테이블(Airtable), 코다(Coda): 오피셜 한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기록, 공유할 때 활용하는 트래커 겸 아카이브.

구글 캘린더(Google Calendar): 서로의 일정을 확인하고 미팅 초대를 보내는 장소.


슬랙의 경우 수천 명이 있는 전체 공지방부터 고마운 팀원을 샤라웃(shout out)하는 thanks 채널, 각 나라/대륙별 노마드 채널, 각자의 홈오피스를 자랑하는 battle station 채널, 팀원들의 생일이나 입사 n주년을 축하해 주는 anniversary 채널 등 재밌는 채널들이 많다. 내가 들어가 있는 채널만 해도 족히 백 개가 넘다 보니 일일이 팔로업할 수 없어, 즐겨찾기 섹션을 따로 분류해 놓고 중요 채널은 수시로 모니터링한다.


대충 이렇게 생긴 슬랙 워크스페이스가 아바타 직장인의 주 근무지다 (이미지 출처: Sprout Social).


원격 근무를 할 때 한 가지 주의점은 사람이 상시 온에어 상태가 된다는 점이다. 친구들과 놀러 나와도 일이 끝난 것 같지 않고, 매니저에게 메시지가 오면 당장 답장을 해야 할 것 같다. 이때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있어도 나는 일 안 한다, 하는 명확한 오프(off)의 경계를 만들어 동료들에게 전달하는 게 좋다.



1-4시 집중 업무(deep focus) 시간


오후 동안 서너 시간 정도 집중해서 일하는 시간대를 만든다. 이 몰입의 시간의 초점은 업무 시스템화다.


원래도 그랬지만 원격근무를 시작한 이후 나는 더욱 극강의 효율충이 되었다. 시간은 사실 내가 가진 가장 귀중한 자원이다. 돈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떨어지지만, 시간은 흐르면 흐를수록 그 가치가 더 올라간다. 그래서 업무 시간에 대한 터치가 없는 만큼, 일은 '열심히'보다도 '잘' 하려 노력한다. 주 40시간 내내 엉덩이 붙이고 눈치 싸움하는 대신 10시간 만에 끝내놓고 30시간 동안 놀러 다니는 게 더 슬기로운 직장생활일 테니까.


일의 효율화는 매뉴얼을 만들 때 시작된다. 반복되는 태스크에서 낭비되는 시간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에는 DRI (Directly Responsible Individual, 직접 책임자) 문화가 있어, 각 프로젝트별로 리드를 맡을 팀원을 수평적으로 정한다. DRI를 몇 번 하고 나면 프로젝트를 매니징 할 때마다 반복되는 프로세스들이 보인다. 그 문제들을 하나씩 자동화하거나 매뉴얼화해 소요 시간을 단축시킨다.


같은 내용에 대해 여러 스테이크홀더(이해관계자)들과 반복적으로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 모든 팀원들을 초대한 워크그룹 채널을 만들고, 퍼블릭 메시지에 바로바로 태그해 업무를 할당한다.

매주 반복해서 진행되는 미팅이나 리포트 보고가 있다. → 챗GPT를 학습시켜 미팅 아젠다와 액션 아이템, 리포트 양식 등을 템플릿화하고 슬랙 워크스페이스에 앱을 연동해 자동으로 공지를 때린다.

시간 차를 두고 릴리즈 요청이 들어와 여러 차례 업데이트를 배포해야 한다. → 스프린트 방식으로 릴리즈 기간을 고지해 놓고 모든 요청들을 같은 일자에 몰아 한 번에 처리한다.

개인 업무 성과나 일정을 다양한 팀원들에게 공유해야 한다. → 에어테이블(Airtable)이나 리클레임(Reclaim.ai)에 프로젝트 트래커와 일정을 정리해 놓고 링크를 전달하거나 슬랙에 연동시켜 버린다.


노션에 이은 내 최애 생산성 툴: 스프레드시트 기반 협업툴 에어테이블, 루틴/태스크 정리 캘린더 리클레임, 최근 괜찮은 자동화 기능들을 달아주고 있는 구글 캘린더



6-8시 운동, 저녁 시간



8-11시 미팅 혹은 자유 시간


발리에 살며 아쉬운 한 가지는 미팅이 주로 밤에 있다는 점. 물론 한국보다야 시차가 나은 편이고, 요즘은 팀원들 자고 있는 아시아 시간대에 일하는 게 오히려 자유롭고 좋다. 우리 팀은 미팅을 꽤나 자주 하는 축에 속하지만,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해 캘린더엔 화수 밤 시간대 슬롯 외의 미팅 초대를 막아놓는다. 이는 내가 밤마다 모든 미팅에 들어가 워라밸 없는 삶을 살 때, 매니저에게 왜 피곤하게 다 들어가고 앉았냐 욕먹으며 만들어진 습관이다(야근이 잦아지면 이들은 보통 걱정하거나 타박하지 절대 칭찬하지 않는다).


팀 미팅은 보통 짧으면 5-10분, 길면 20분 넘게 이어지는 근황 토크와 함께 시작된다. 잠옷을 입고 침대에 기댄 채 들어갈 때도 있고, 자기 반려동물이나 아이를 보여주는 팀원도 있다. 한 명 한 명 지난 한 주간 어땠는지 물어보고, 주말이나 휴가를 가서 놀다 온 사진을 팀 채널에 공유하기도 한다. 나는 팀원들 사이에서도 여행을 많이 다니는 찐 노마드로 소문이 난지라 실시간 여행 썰을 풀며 종종 부러움을 산다. 팀원들 다 같이 술과 음료를 챙겨 와 함께 게임을 하는 소셜 콜, 모여서 각자 일하는 코워킹 콜도 정기적으로 연다.


대부분의 팀원들은 사실 슬랙과 줌이라는 디지털 세상 바깥에서 만나본 적이 없는 인간들이다. 미팅을 할 때도 카메라를 꺼놓는 경우가 많아, 목소리나 문체 수준으로만 안면(?)을 튼 팀원도 많다(AI 아바타래도 할 말이 없겠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회사에서는 일 년의 한 번 정도 팀원들이 오프라인에서 직접 만나 교류하며 팀워크를 다질 수 있도록 리트릿이 열린다. 올해엔 유럽에 있는 팀원들은 부다페스트에서, 미주에 있는 팀원들은 라스베이거스에서 한바탕 놀고 왔다. 나의 경우 아시아 태평양 지역(APAC) 리트릿에 곧 참여해 베트남의 푸른 섬으로 떠날 예정이다.


대충 이런 곳에서 회사 사람들과 대면해 다깉이 워크샵을 하고 파티를 즐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일할 때도 제대로! 놀 때도 제대로! 노는 아바타들의 왕국이랄까. 누구나 나와 다른 배경과 생각을 가진 이들을 포용할 줄 알고, 상명하복 질서 없이 의사결정권자로서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있다. 미국, IT, 리모트 회사라는 타이틀을 다 떠나서, 직원들의 자발적인 책임 의지로 굴러가는 이런 디지털 세계 속 회사는 자유롭고 건강한 사내 문화가 있기에 가능한 게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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