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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avn Jan 29. 2024

일하면서 20개국 세계여행

3년 차 노마드의 2023년 회고록

브루마블을 시작한 지 약 3년 차,
20개국 48개 도시를 여행했다.


좌측은 Flighty 앱에서 발급한 나의 2023년 항공편 여권, 우측은 Nomadlist 프로필에 기록된 'Year in Review 2023' 지도다.
노션에도 기록한 2023년 브루마블 (이쯤 되면 환장할 J인 게 티 날까 봐 조금 우려스럽다)


불과 3년 전의 나는, 내가 이리 여행에 미친놈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본디 나란 놈은 경기도 당일치기 여행도 친구들에게 멱살 잡혀 질질 끌려가던, 귀차니즘이 상당한 인간이었다. 그렇게 원심력이 제로에 가까웠던 내가 3년도 채 안되어 20개국, 이전에 (끌려)갔던 자유여행까지 소환하면 26개국을 찍게 된다.


(손꼽을 수 없이 많지만) 2023년도 행복으로 반짝반짝 빛났던 몇몇 모먼트들


시작은 원격근무였다. 정확히 짚자면 여행을 하기 위해 원격근무를 시작한 게 아니라, 원격근무가 나의 성향을 180도 바꿨다. 평생 한국을 떠나볼까 싶었던 토박이를 이렇게 역마살 가득한 망아지로 만든 걸 보면, 시공간의 자유가 개인에게 미치는 힘이 진짜 강력하구나 싶다.


방랑벽으로 인해 반강제로(?) 빚어진 취향이나 습관만 봐도 그렇다. 난 돈을 모아서 좋은 차나 명품백을 플렉스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어차피 그 차로 지구 반대편으로 떠날 수도 없고, 타지에서 비싼 장신구를 차 봐야 소매치기에게 자기 PR 하는 꼴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남들이 그렇게 푸는 스트레스를 나는 구글맵에 북마크를 모으고, 처음 보는 국기를 검색하고, 비행기 티켓을 끊으며 푼다. 물건이 많은 어른보단 지식과 견문(= 식견)이 많은 어른이 더 폼난다고 생각한다.



노마드 3년 차 - 좋아하는 곳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일을


항공편 플렉스가 노마드의 최대 혜택처럼 비칠 수 있지만, 3년 차가 돼서야 깨달은 이 라이프스타일의 찐 묘미는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규율 - 일터는 원래 가기 싫은 곳이고, 일은 원래 따분하고 힘든 것이고, 오피스는 모두가 같은 시간에 같은 헬게이트를 따라 출근해야 하고, 그렇게 도착하면 일이 있든 없든 최소 6시까지 엉덩이를 붙여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수고를 승진과 연봉 인상을 위해서라면 감내하라는 규율 - 에 "왜 그래야 하죠?" 하고 묻는, 피곤한 부적응자들 말이다.


원격으로 언제 어디서든 자유로이 일하는 노마드 세계에는, 그렇게 삐딱선을 타다 사회에서 제적당한 반항아들이 많다. 정규분포 극단에서 허우적대는 아웃라이어들이야말로 리모트 워크처럼 현 시스템을 뒤집는 새로운 길에 가장 열려있다. 나 역시 이 유목민 친구들 덕분에 '노마드'라는 삶의 방식을 알게 되었고, 그들을 통해 이 세계에 들어올 수 있었으며, 그들과 함께 더 많은 사람들을 이쪽 세계로 꼬시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3년도에는 감사하게도 회사와 프로젝트 팀에서 리트릿*이 여러 차례 열린 덕에, 함께 일하는 노마드 친구들과 좀 더 깊이 있는 시간을 보낼 기회들이 많았다. 3년 만에 처음으로 함께 일하는 회사 팀원들을 직접 만나 일주일간 섬에서 동고동락도 해보고, 프로젝트 팀원들과 같이 바닷가에서 모닥불을 피워 속 깊은 대화를 나누거나 페스티벌에서 광란의 밤을 보내기도 했다.

리트릿*: 팀원들이 함께 일정 기간 특별한 장소로 가서 업무에 대한 아이디어를 나누거나 휴식을 즐기며, 서로 더 가까워지고 배우고 성장하는 집중적인 팀 빌딩 시간.


팀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느낀 점은 출생지, 성별, 나이, 종교 그 무엇 하나 공통분모가 없는 사람들임에도, 꼭 반복 등장하는 인생의 궤적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1.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채워지지 않는 갈증으로 2. 삶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걸 일순간 자각한 뒤 3.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 하나로 뛰쳐나와 4. 우여곡절 끝에 돈 벌면서 세계여행하는 유목민으로 전향.


한국에서 자유로운 삶을 동경하며 하루하루에 머리를 싸매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패턴을 따라 나도 이들 무리에서 함께 무용담을 나누고 있었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과 함께 걸을 것


3년을 떠돌고서 보니 사실 '좋아하는 곳에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일을 하는 비결'은 좋아하는 사람들을 잘 찾아 붙들어 매는 데에 있었다. 자유로운 삶을 사는 이들을 동경하고 가까이하며 얻은 영감과 자극, 유연한 사고가 결국 나를 자유로운 삶으로 이끌었다. 그러다 길을 잃어도 주변에서 같은 곳을 향해 걷는 이들이 구심점을 잡아준 덕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노마드 라이프스타일은 리모트잡이라는 미션을 달성하면 주어지는 트로피, 결과물 같은 게 아니다. 랜덤 주사위로 고르는 행선지, 늦잠이 보장되는 업무 시간, 일하고 있어도 휴가를 나온 듯한 오션뷰 카페 - 보통 여기까지가 사람들이 상상하는 노마드의 삶이다(그리고 보통 여기까지가 내 인스타그램의 하이라이트다). 그 후 끝. 해피엔딩.


실상은 그 트로피를 잡고 혼자 낄낄 대며 만끽하는 희열은 보통 딱 일 년 간다는 점이다. 그 후에 다가오는 감정은 일에서의 어마어마한 수준의 자유를 스스로 통제해야 한다는 압박감, 실패할 때마다 임포스터 증후군마냥 스스로를 깎아내리며 드는 자책감, 여행하며 반복되는 만남과 헤어짐에 따른 상실감, 해외를 전전할수록 멀어지는 고향 가족, 친구들과의 단절감, 현지에도 완전히 동화되지 못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감, 여행지에서 흥청망청이로 살다 텅 빈 지갑을 발견하는 순간 밀려오는 빈곤감 등이 있다. 이런 입체적인 얼굴을 가진 수십 년짜리 노마드로서의 삶은 나의 자유를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면서 혼자 자폭하지 않도록 부단히 안팎으로 싸워가는 ‘과정’에 더 가깝다.


상기의 이유로 유목 생활의 사춘기로 멘탈이 무너진 2022년 내가 2023년 완전히 회복될 수 있던 이유는 곁에서 나와 나란히 걸어준 사람들 덕분이었던 것 같다. 지구를 떠돌아도 외롭지 않도록 함께 일하고, 함께 살 집을 만들고, 아웃라이어들을 위한 신나는 환영식을 시도 때도 없이 여는 파티광 노마드 친구들. 이런 삶이 궁금하고 재밌어 보인다며 내가 어디 있든 불쑥불쑥 찾아와 주는 가족들과 친구들. 몇 달, 몇 년이 지났어도 다시 방문할 때마다 두 팔 벌려 환대해 주는 로컬 친구들. 이 사람들과 연결되어 일을 하고 세상을 여행한 덕에 나의 2023년은 조금 더 시끌시끌했다.


'우리'의 여행을 위해 2023년부터 시작한 자그마한 것들이 있다. 1. 자유로운 삶을 꿈꾸는 아웃라이어들을 위한 노마드 커뮤니티 키워가기, 2. 여행이 혼자만의 소비가 아닌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는 영감이 되도록 사진과 영상 공부하기, 3. 지구의 다른 이웃들에게도 감사함을 전할 수 있도록 정기후원하기. 2024년에는 여기에서 조금 더 가지를 뻗어, '혼자'보다 '우리'다운 유목 생활을 슬기롭게 헤쳐나가 볼 생각이다.


그러니 같이 해요, 여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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